9-5 아베 담화는 무엇이 문제인가?

2015년 8월 1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종전 70년’을 맞아 내각총리대신 담화를 발표했습니다.(이하 ‘아베 담화’1)。아베 담화에는 이 책의 핵심 테마인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 및 조선인 ‘위안
부’ 문제가 명백히 빠져 있습니다. 이에 이 책 전체의 결론을 대신하여 1990년대 이후 역사수정주의의 흐름 속에 아베 담화를 자리매김하고 그 문제점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目次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의 흐름

 아베 담화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에 대해 1990년대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 국내에서의 논쟁과 정치적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2.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이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지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 담화(1992)와 고노 료헤 관방장관 담화(1993)를 통해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용의주도하게 회피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었습니다.12-4 참조。그리고 1993년 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 “침략 행위”,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쓰면서 “반성과 사과”를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공식담화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4 당시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아베 신조도 이 위원회의 위원이었습니다. 1994년에는 무라야마 내각의 “전후 50주년” 결의를 저지하고 “자학적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전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오쿠노 세스케 회장,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으로 개칭)이 조직되었고 아베 의원은 사무국장 대리를 맡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1996)이 결성되는 등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그들의 주공격 대상은 고노 담화 및 무라야마 담화,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내용을 게재한 역사교과서였습니다. 1997년에는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와 아베 의원이 사무국장을 맡은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나카가와 쇼이치 회장 6

이와 같이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전쟁 책임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젠더 차별 문제를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의 민주화 등을 계기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정치적 결착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피해자 개인의 목소리가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12-1 참조)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정하다

 아베 담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기 위해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운동을 봉쇄하려는 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베 담화는 이 책의 테마인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과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명백히 그리고 구조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서양 제국(諸國)’의 식민지화에 관한 문제를 말했을 뿐,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7

 아베 담화에는 19세기 “서양 제국”의 “식민지 지배의 물결”이 아시아로 밀려든 것에 대한 “위기감”이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쓰여 있지만, 같은 시기 일본이 제국헌법을 제정해 제국의회를 만들고 곧이어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많은 민중을 학살하는 한편 타이완을 식민지화했다는 역사는 지워지고 없습니다.8

러일전쟁에 대해 아베 담화는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주권 침탈의 출발이었습니다.(6-2 참조)이후 조선에서 일어난 의병전쟁을 일본의 군경은 철저히 토벌했고6-4 참조)이어 한국병합(1910)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러일전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의 출발점이 된 것이지, 결코 조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아베 담화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의 움직임이 확대되자 그때까지의 식민지화에 제동이 걸렸”다고 합니다. 큰 세계사적 흐름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도 발걸음을 맞췄”다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선 일본은 독일령이었던 남양군도를 점령하여 지배 영역을 넓혔으니 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에 발표한 ‘14개조 평화원칙’에 “민족자결”이 포함되었고 이것이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 1919년 조선 각지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민족자결’의 움직임을 무력으로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 통치 방식은 바뀌었지만, 경찰력은 오히려 증강되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은 보다 철저해졌습니다.6-4참조)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식민지 문제를 명백히 그리고 구조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베 담화는 “300만 여의 동포”의 “목숨”과 “전투를 벌인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식민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후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영원히 결별”했음을 맹세했다 하더라도, 패전으로 인해 식민지가 일본의 영토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사과와 비슷한 표현을 쓴 대상도 “앞선 대전에서 한 일”뿐,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사과의 뉘앙스를 풍기는 그 어떤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아베 담화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정해진 무(無)배상 원칙을 발판삼아 국제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베담화가 말하듯 전승국이나 피해국 사람들의 “관용의 마음” 덕분이 결코 아닙니다. 냉전하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것을 가능케 했을 뿐입니다. 98-2 참조)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 속에서 한일조약의 청구권 문제가 규정됨으로써 한일 간의 협정은 결과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도 배상도 일절 없는 ‘정부끼리의 해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8-3 참조)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책임문제의 원천인 것입니다.12-2 참조)

 덧붙여 말하자면 아베 담화는 일본이 “이웃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전후 일관되게 그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다해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현재 일본을 함께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 재일조선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일본은 바다 건너 가장 가까운 ‘이웃 아시아’,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한국전쟁) 서둘러 경찰예비대를 설치하고 재군비를 촉진시켜 ‘조선 특수’를 누리고 헌법의 틀까지 넘어 소해정(掃海艇)과 해상수송선을 한국으로 비밀리에 보냈습니다.10 이런데도 일본이 이웃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니 말이 안 됩니다. 일본과 재일조선인, 한반도와의 관계 및 역사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한 총리대신의 담화에 결코 나와서는 안 될 말입니다.

일반론적인‘여성의 인권’에 묻혀버린‘위안부’문제

 이렇듯 아베 담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명백히 부인하는 입장에서 쓰였습니다. 이러한 식민지 문제 은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과도 연관됩니다.

 아베 담화에서 조금이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표현을 굳이 들자면, “전쟁하에서 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깊이 상처받”았다는 문장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상처받았다”라는 너무나 일반론적인 말만으로는 도대체 누가 어떤 여성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상처받는 일이 없는 세기로 만들”겠다는 ‘미래지향’적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여성들의 피해를 이런 식으로밖에 다루지 않는 아베 담화에, 민족(인종) 간의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식민지지배의 문제가 개입될 여지는 없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젠더 문제와 민족 문제를 각각 다른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이미 수도 없이 제기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담화에서는 민족 문제는 무시한 채 ‘여성의 인권’만을 뚝 잘라내 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은폐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연원에는 일본군 기지와 일본인 거류지 인근에 도입된, 일본 ‘내지’와는 다른 체계로 운용된 식민지 공창제가 있었습니다.(5-1 참조)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제도하에서 식민지로부터 미성년자까지 포함한 여성들을 대량으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에는 ‘내지’의 일본인과는 다른 차별적 체계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5-55-7참조)일본이 식민지에서는 국내법 및 국제법 등을 ‘내지’와는 달리 차별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6-16-3참조)‘여성의 인권’이라는 일반론만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은 20세기 비판적 페미니즘론에서 거듭 지적해 왔습니다.11 바로 이 점이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아베 담화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계속 사죄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죄란, 사실관계에 관한 5W1H(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누구에게, 왜, 어떻게 했는가)를 포함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추궁, 배상 등의 조치가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적 관계에 비유하자면 아무런 진정성이 없는 ‘미안합니다’라는 공허한 말처럼 상대방을 분노시키는 말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사죄를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게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여태껏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사죄도 한 적이 없습니다.

 강풍에 날려 미래로 날아가더라도 뒤를 돌아보고 눈을 활짝 뜨며 멀어져가는 과거의 잔해를 지켜보는 천사-바로 이 모습이 나치스 독일에서 목숨을 잃기 직전에 사상가 벤야민이 그렸던 ‘역사의 천사’입니다.12。‘발전’이나 ‘세계화’라는 강풍에 날려 단지 앞만 보고 ‘미래지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천사와 함께 20세기 폭력의 역사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갖춰야 할 기본자세이지 않겠습니까?

  1.  역대 총리대신 담화, 지시는 수상 관저위 홈페이지(www.kantei.go.jp/jp/97_abe/discource/archive/)를 참조.
  2. 1990년대부터 시작된 관련 움직임에 대해서는 후지나가 다케시「「慰安婦」問題と歴史修正主義についての略年表」(http://www.dce.osaka-sandai.ac.jp/~funtak/databox/nenpyo.htm)、다와라 요시후미 홈페이지(http://www.ne.jp/asahi/tawara/goma/)、이타가키 류타「歴史教科書問題日誌」(http://www.jca.apc.org/~itagaki/history/chron.htm)를 참고하길 바란다
  3.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9-1 참조[/efn_note}(무라야마 담화)참조)를 발표하였는데, 이 담
    화에서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국가들, 특히 아시아제국(諸國)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라고 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정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습니다. 1993년 호소카와 연설에 반발하여 자민당 내부에 만들어진 ‘역사검증위원회’(야마나카 사다노리 회장)는 역사수정주의 논객들을 모아 1995년에 대동아전쟁은 ‘올바른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3歴史・検討委員会『大東亜戦争の総括』展転社、1995년

  4. )등 국회의원의 조직화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습니다. 나중에 성립된 제1차, 제2차 아베 내각에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 각 단체의 인맥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5전게 다와라 요시후미의 홈페이지에 각료에 대해 상세히 분석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2001년 1월에 방영된 NHK 다큐멘터리 <전시 성폭력을 묻는다>의 프로그램 개악 사건이 일어났다. 이 프로그램의 테마는 2000년에 도쿄에서 개최된 여성국제전범 법정이었는데, 아베 의원 등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 및 ‘일본회’의 멤버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외압을 가하면서 NHK 간부의 지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일본의 책임을 다루는 장면과 내레이션이 대폭 잘려나갔다. 자세한 내용은『番組はなぜ改ざんされたか』(一葉社, 2006)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5. 그렇다고 해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의미에서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타가키 류타, 「탈냉전과 식민지배책임의 추급」(나카노 도시오, 김부자 편저, 『역사와 책임』, 선인, 2008)을 참조하기 바란다.
  6.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조선 민중 학살에 대해서는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이노우에 가쓰오지음, 동선희 옮김, 어문학사, 2014)를 참조하기 바란다.
  7. 실제로 아베 총리는 2015년 4월에 미 연방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전후 일본에 대해 “미국의 리더십”하에서 “냉전에 승리”한 역사라고 총괄했다.
  8.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서는 大沼久夫編,『朝鮮戦争と日本』(新幹社, 2006), 城内康伸,『昭和二十五年最後の戦死者』(小学館, 2013), 防衛省防衛研究所,『朝鮮戦争と日本』(http://www.nids.go.jp/publication/mh_tokushu/、2013)을 참조하기 바란다.
  9. 관련 논의에 대해서는 岡真理,『彼女の「正しい」名前とは何か』(青土社, 2000), 米山リサ,『暴力·戦争·リドレス』(岩波書店, 2003)를 참조하기 바란다.
  10.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歴史の概念について」,『ボードレール他五篇』, 岩波文庫,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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