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식민지 조선에도 공창제도가 있었는가?

目次

일본이 식민지에 도입한 공창제도

 

일본은 식민지 타이완(1895~1945)과 조선(보호국화 1905~1910, 병합 1910~1945)에 일본 ‘내지’1의 제도를 본떠 근대 공창제2를 도입했습니다. 식민지에 도입된 공창제는 영업 장소의 지정과 격리, 성병 검진의 의무화 등에서는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창기의 허가 연령은 타이완 16세, 조선 17세로, 일본 ‘내지’의 허가 연령인 18세보다 낮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허가 연령의 차이로 인해 가난한 여성들이 일본 ‘내지’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타이완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형성되었습니다.

 타이완의 공창제 도입은 식민지가 된 직후인 1896년, 타이페이현령(臺北縣令) 갑(甲) 제1호 ‘가시자시키(貸座敷) 및 창기(娼妓)단속규칙’ 제정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906년에 일본군이 침공함으로써 타이완총독부의 지배력이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공창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때, 지역마다 다른 유곽3 및 창기 관련 단속 법령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폐해를 시정한다고, 타이완총독부는 ‘가시자시키 및 창기단속규칙표준’, ‘창기검진 및 치료규칙표준’을 정하여 관련 규칙을 통일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업자도 창기도 ‘내지’에서 온 일본인들뿐이었지만 1907년에 타이완 유일의 타이완인(人) 유곽 구역이 타이난현에 만들어졌습니다.

1905년경으로 추정되는 인천
시키시마(敷島, 현 신흥동)의
유곽. 왼쪽 건물은 일본군 주
둔지  

조선 식민지화와 유곽 출현 그리고 전개 양상

 1876년 개항 직후 조선에 사는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개항장인 부산과 원산에 만들어졌고 일본영사관이 일본 ‘내지’의 단속 규칙을 적용하여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과 청 이외에 미국 및 유럽 각국의 영사관도 개설되자, 일본외무성은 서양 국가들에게 일본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공창제를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공창제를 둘러싸고 반대하는 외무성과 존속시키려는 인천의 일본영사관의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그 결과 실상을 쉬이 알 수 없도록 유곽은 ‘요리점’, 창기는 ‘예기(藝妓)’ 혹은 ‘작부’라고 부르는 것으로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애매한 용어들이 여성들을 속이는 수법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부산과 원산에서 신규영업은 금지되었지만 이미 영업하고 있던 업자는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외무성과 영사관의 타협으로 유곽을 ‘요리점’으로 부르게 되었지만, 청일전쟁 무렵부터 유곽과 똑같은 영업을 하는 요리점은 보통 요리점과 구분지어 ‘특별요리점’이라 불렀습니다. 창기에 대해서도 ‘제2종 예기’ 혹은 ‘을종(乙種) 예기’라고 하여 일반 ‘예기’와는 구분지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공창제 확립의 기초가 마련되어간 것입니다.

 자료1은 1902년에 간행된 『韓国案內』4라는 책에 실린 광고인데, 당시 요리점으로 위장한 공창제의 실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리점의 실체는 조선인 창기를 고용한 유곽이었음을 이 광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료1] 香月源太郎『韓国案内』(1902) 권말 광고

 러일전쟁 때에는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한국주차군)5기지에 군이 설치와 운영에 관여한, 위안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性)관리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주차군 사령부가 있었던 서울에서는 ‘화류병예방규칙’, ‘예기건강진단시행규칙’을 정하여 매춘부의 성병을 철저히 검진함으로써 군인들의 성병을 예방하고자 했습니다.

 1905년 보호국화 이후 공창제와 다름없는 성매매 시스템이 조선 각지의 일본군 기지, 일본인 거류지로 확산되었습니다. 1916년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상설부대의 체제가 정비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조선총독부는,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지역마다 달랐던 유곽 및 창기 단속규칙을 통일시켜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리고 관련 용어도 요리점은 유곽, 예기는 창기라는 원래 명칭, 즉 일본 ‘내지’의 공창제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자료2 공문서 참조)

[자료2] 진해 해군기지에서 해군이 유곽업자에게 영업할 토지를 대여한 다는 내용의 공문서 海軍省,『明治四五年∼大正一年 公文備考 鎮海永興関係書類二三』

조선의 공창제의 실상과 민족 차별

 하지만 조선의 공창제의 실상은 일본 ‘내지’와 달랐습니다. 허가 연령뿐만 아니라 단속 규칙의 형식과 내용도 달랐습니다. 일본 ‘내지’에서는 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시청의 ‘유곽영업규칙’과 창기를 대상으로하는 내무성의 ‘창기단속규칙’을 각각 따로 규정했지만(1900년),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유곽창기단속규칙’ 하나로 통일시켜, 업자와 창기를 일괄적이고 효율적으로 단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업자와 창기에 대한 규칙이 하나로 뭉뚱그려졌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본 ‘내지’의 ‘창기단속규칙’에 정해져 있는 창기의 권리조차보장받지 못했습니다.

한국병합 후의 인천 시키시마(敷島, 현 신흥동) 유곽 입구
(1920~1930년대 엽서)

 예를 들어 일본 ‘내지’에서는 창기가 일을 그만둘 수 있는 권리=폐창에 관한 내용이 ‘창기단속규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업자가 영업을 접을 권리=폐업이 ‘유곽창기단속규칙’ 중 업자에 관한 조항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창기가 폐창의 권리를 가졌지만 조선에서는 창기의 폐창은 안 되고 업자의 폐업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업자가 눈에 띄는 곳에 단속 규칙을 붙여두어 창기들이 자주 볼 수 있도록 해야 했지만, 조선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설령 규정이 있어서 단속규칙이 붙어 있었다 하더라도 한자와 일본어가 뒤섞인 법령문을 대부분의 조선인 창기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도리마치(綠町)’라는 말이 유곽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될 정도로 유명했던 부산의 미도리마치(綠町) 유곽(1920~1930년대 엽서)

 식민지 공창제의 목적은 치안 유지, 풍기 단속, 공중위생, 식민지 지배의 경제기반 보완이었습니다. 관할 경찰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매춘객의 명부 작성과 보관까지 일일이 체크하는 등, 업자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과 압력이 ‘내지’보다 훨씬 철저히 그리고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창기에 대한 민족차별은 폐창의 권리와 같은 법령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차금(前借金)6의 금액과 대우 등에서도 나타났습니다. 1929년 평양의 창기 수입을 비교해보면, 평균적으로 조선인 여성의 수입은 일본인 여성의 1/3에 불과했고, 전차금도 1/3에서 1/4정도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유곽의 창기들은 기본적으로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3년에 외출 제한의 일부가 풀렸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선에서는 1년 후인 1934년 말이 되어서야 적용되었습니다.

 조선인 창기 수는 계속 증가해 1939년에는 조선 내 일본인 창기 수를 넘어섰습니다. 한편 1920년대 초부터 타이완으로 가는 조선인 창기가 늘면서 1930년에는 타이완 내의 조선인 창기가 타이완인 창기보다 많아졌습니다.

공창제에서‘위안부’제도로

 중일전쟁 때 타이완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가 상하이파견군 지휘하로 편입되어 대부분 중국으로 이동하자, 타이완인 창기를 포함한 많은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타이완에서 중국 화난 지방의 전쟁터에 보내졌습니다.7

 이것은 일본군이 식민지 공창제를 ‘위안부’ 제도에 적극 활용한 결과이자, 식민지의 공창제와 군대가 강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전장의 ‘위안부’ 제도와 전장이 아닌 곳의 공창제와의 차이도 있지만, 공창제 자체도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달랐습니다. ‘위안부’ 제도와 공창제의 연속성을 간과해서는 식민지 공창제라는 명목하에 자행되었던 조직적 성폭력의 측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1. 이 시기 일본은 일본 본토를 ‘내지(內地)’, 조선 및 타이완 등의 식민지를 ‘외지(外地)’라고 불렀다.
    이 책 전체적으로 식민지 당시에 대해 ‘일본’이라고 하면 식민지를 포함한 ‘대일본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 본토만을 가리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내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공창제 및 관련 용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창제란 국가가 여성의 신체와 생활을 구속하고 관리하는 매매춘제도이다. 그리고 유곽은 공식 인가받은 유녀옥(遊女屋, 여성 유녀가 남성 손님을 접대하는 가게)을 치안 유지와 풍기 단속의 목적으로 한곳에 모아놓고 그 주위를 벽이나 담으로 둘러싼 구획을 말한다. 1872년 ‘예창기(藝娼妓)해방령’이 공포되어 이듬해 유녀옥은 가시자시키(貸座敷)로, 유녀는 창기로 개칭되었다
  3. 일본어 원문은 가시자시키(貸座敷). 주2과 같이 가시자시키와 유곽은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법령 등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유곽으로 통일했다.(번역자 주)
  4. 香月源太郎、青木嵩山堂、1902年。
  5. 韓國駐箚軍. 러일전쟁 때인 1904년, 일본인 보호를 핑계로 주둔한 일본군으로 조선군의 전신이다. 사령부는 서울의 대관정(大觀亭, 현 웨스틴조선호텔 인근)에 설치되었다가 1908년에 용산으로 이전되었다.
  6. 전차금이란, 창기가 될 때 장차 일을 해서 갚는다는 조건으로 주로 창기의 부모가 고용주에게 미리 받는 돈인데 높은 이자 때문에 실제로는 모두 갚기가 매우 힘들어 그 일을 그만두기 힘든 족쇄가 된다.
  7. (財)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第1巻、龍溪書舎、199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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