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식민지 하에서 조선은 평화로왔다고?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이라 하면 대부분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까지의 ‘15년전쟁’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으로 눈을 돌려 본다면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과 타이완의 민족운동을 군사력, 경찰력을 동원하여 혹독히 탄압하였고 일반 민중들에게도 수많은 인권 유린을 자행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본다면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50년전쟁’을 벌여온 셈이니 ‘15년전쟁’ 이전을 침략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1

 또 식민지 조선에서의 인권 유린이나 민족운동은 ‘비일상’적인 일일 뿐, 식민지 사회를 살던 조선인들의 일상은 이와는 달리 평화로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식민지 조선에도 일상생활이 영
위되고 있었다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의 ‘근대화’로 인해 조선인의 일상이 평화로웠고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지배를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는 생각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예
를 들어 『만화 혐한류(マンガ嫌韓流)』(山野車輪, 晋遊舎, 2005)에서는 일본인이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힘썼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때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우호관계가 정말 존재했구나”라는 식의 대사가 등장합니다.2

 그렇다면 일본은 정말 식민지 조선에 평화를 가져다주었을까요?

目次

조선의 식민지화와‘폭도 토벌’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해 나갔는데 이에 맞서 조선인들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의병전쟁은 무장봉기였고 전국적인 항일전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일본은 의병전쟁을 군대,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철저히 탄압했는데(‘폭도 토벌’=치안전3, 이때 “응징”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항일운동의 탄압은 근거지 초토화, 철저한 토벌, 촌락 연좌제4적용 등 매우 가혹했으며 일본 군인이 조선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5

 전라도에서는 1909년 9~10월에 ‘남한대토벌작전’이 시행되었는데 이 작전은 “제국의 위신”을 조선인에게 과시하고 “일본인의 대한(對韓)사업 발흥(勃興)”, 즉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화 과정에서는 ‘개발’과 ‘치안전’이 동시에 수반되었고 식민지 지배 아래 ‘개발’ 또한 폭력을 바탕으로 추진되었음을 고려한다면, ‘개발’ 추진 =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우호, 치안전= 예외상태라 구분 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치안전을 둘러싼 긴장을 조선 사회에 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위단 규칙(1907.11.)은 헌병, 경찰, 군대의 지휘 아래 각 마을에 자위단을 설치하고 무기 적발, 귀순 장려, 순찰 경계, 의병운동 정탐 등을 통해 의병을 색출하고 탄압하기 위한 것으로, 일상생활의 터전인 마을에서의 지배와 저항을 둘러싼 갈등과 알력을 심화시켰습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도 1907년 7월 27일에 보안법이 시행되어, 내부대신의 단체 해산과 경찰관의 집회 및 대중운동의 제한, 금지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무단통치’와 민중들의 일상생활 : 1910년대

 한국병합 무렵에는 항일의병운동이 거의 진압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에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의병탄압이 주 목적이었던 조선주차군은 1개 반 사단의 규모로 편성되어있었는데 이후 2개 상설사단체제의 조선군으로 확대·재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병합 후에도 민중들의 반란이 두려워 예방차원에서 철저히 단속하기 위해 의병 탄압 때와 같은 규모의 헌병경찰 지배를 계속했습니다. 무관 출신만이 조선총독이 될 수 있었던 제도하에서 힘으로써의 지배를 전제로 한 1910년대의 식민지 지배 방식을 ‘무단통치’라고 합니다.

 헌병경찰의 업무는 정보 수집과 ‘폭도 토벌(치안전)’과 같은 종래의 군사경찰의 업무에 더해, 민중생활 전반을 관리 장악하는 것6이 추가·확대되었습니다. 경찰범 처벌규칙(1912.4.) 87조를 보면 일상행위가 구류와 과료(벌금의 일종)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상행위란 예를 들어
‘유언비어’, ‘기도’, ‘돌싸움(石戰)’, ‘도로청소 태만’에서 ‘생업 없이 배회’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죄즉결례(犯罪即決例)’(1910.12.)로써 구류, 태형,7 과료에 해당하는 죄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엔 이하의 벌금 등의 죄에 대
해서는 법원의 절차를 밟지 않고 경찰서장 또는 헌병대장이 그 재량으로 즉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즉결처분 건수는 1911년의 약 18,100건에서 1918년에는 약 82,100건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게다가 태형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되었고 집행 건수는 1911~1916년 동안 약 5배로 늘었습니다. 일상생활에 대한 치안 통치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병이 민중들에게 강화하는 모습(1915). 출전:『軍事警察雑誌 』9-6(1915.6)

 特に風俗警察においては、売春管理法である「貸座敷娼妓取締規則」が制定されるなか、酒幕営業者が民族運動を匿っていると疑い、厳しく取り締まりました(植民地公娼制については5-1参照)。

 これらの取り締まりは、朝鮮人憲兵補助員が行商人、学生、神官、僧侶、土木夫、俳優、郵便夫、洋服屋、石工、古着商、古鉄売、乞食、鳶職、請負業者、農夫、樵夫、傷病者、車夫、遊戯人、煙突掃除夫、飴売、尼などに変装して常に調査に当たらされていました。

헌병들의 변장 연습(앞줄이 일본군인, 뒷줄이 조선인 헌병보조원, 1914.) 출전 :『軍事警察雑誌』8-10(1914.10.)

‘문화통치’이후의 전개 : 1920년대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식민지 통치 방식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8로 바뀔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조선 민중을 ‘소요 예비군’으로 여기며 일상생활까지 ‘소요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철저히 단속하는 통치의 근본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찰관의 수와 비용, 경찰서의 수도 약 3배로 늘었고, 대량의 총기가 배치되고 군대식 훈련과 호구조사를 통한 일반민중의 감시도 강화되었습니다.

 ‘문화통치’ 초기에는 언론·출판·집회 ·결사에 대한 단속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 조선어 신문, 잡지 발행과 단체 결성 등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신문, 잡지의 검열이 굉장히 엄격했고, 집회에는 항상 경찰관이
임석해서 감시했기 때문에 연설 내용 때문에 그 자리에서 체포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인들의 운동을 한층 더 탄압하기 위한 법령이 잇달아 정해졌습니다. 6 · 10만세운동,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등 활발히 진행되었던 민족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은 1925년 5월에 시행된 치안유지법 등으로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36년 12월에 교부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근
거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기소유예를 받거나 탈옥한 자는 ‘보호감찰’ 처분의 대상이 되어 사상전향을 강요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경찰의 사회지도 체제는 일반행정과의 상호 보완관계 속에서 점점
강화되었습니다. 전쟁 때에는 경제경찰까지 신설되어 민중들의 경제생활 통제도 심해졌습니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된 무력탄압

 중국과의 국경 부근에서는 무력을 동원한 민족운동 탄압이 계속되었습니다. 3 · 1운동 후, 국경 부근 헌병의 역할은 “재간불령(在間不逞)자의 소탕”, 즉 간도9의 독립군을 비롯한 조선인 민족운동 단속과 탄압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국경헌병의 직무는 “평지대의 헌병과 달리 불령선인을 경계하는 것으로 전시 근무와 같다”라고 인식되고 있었습니다.10 이후 치안전은 동북항일연군이 활동하던 만주로 대상을 옮겨 계속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경찰, 헌병, 군대의 조선인 단속과 탄압은 1945년 8월 15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식민지의 일상생활에 대해 이러한 치안전이나 가혹한 치안유지와는 상관없는 근대화된 일상이 있었다는 것만 강조하고 15년전쟁 때 조선은 제국의 일부였고 ‘전쟁터는 아니었다’11라고 주장한다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식민지 지배의 근본적 성격을 왜소화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요?        

  1. ‘50년전쟁’에 관해서는 宋連玉,「公娼制度から「慰安婦」制度への歴史的展開」, VAWW-NET
    Japan 編,『「慰安婦」戦時性暴力の実態I』, 緑風出版, 2000.
  2. 板垣竜太,「『マンガ嫌韓流』と人種主義 : 国民主義の構造」,『季刊前夜』11号, 2007年 春号 등.
  3. ‘치안전’이란 일반적으로는 게릴라 등의 반정부세력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 및 경찰행동을 가리키
    는 이른바 ‘비정규전’이다. 단, 식민지에서는 비정규전은 어디까지나 지배 측의 인식이었고 저항하는 측은 정규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4. 여기서 말하는 ‘촌락 연좌제’란 1907년 9월에 하세가와 군사령관이 조선 전역에 내린 고시 중 “혹은 비도(匪徒)에 가담하거나 혹은 이를 은폐하거나 혹은 흉기를 은닉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마을이나 읍에 물어 그 전체를 엄중히 처벌하겠다”「( 明治四〇年九月軍司令官ノ告示」, 韓国駐箚軍,『明治四〇∼四二年暴徒討伐概況』,〈中央―千代田史料六二三〉, 방위청 방위연구소도서관 소장)라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 고시가 나온 후 일본군은 비협력적인 마을에 무차별적인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5. 「日兵行悪」,『大韓毎日申報』1907.8.30.
  6. 민사소송 조정, 국경 세관업무, 산림 감시, 민적(民籍) 사무, 천연두 예방 접종, 외국 여권, 우편 호위, 여행자 보호, 동물 검사 및 검역, 해적 및 밀어선 수입 경계 단속, 사람이나 가축에 해를 입히는 짐승(害獸) 구제, 묘지 단속, 노동자 단속, 일본어 보급, 도로 개수, 나무 심기 및 농사 개량, 법령 보급, 납세의무의 고지 등.
  7. 태형이란 채찍으로 때려 고통을 주는 체벌형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의 태형은 5형의 하나로 경범죄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는데 대한제국 시기에 ‘야만’적 형벌이라 하여 감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무단통치’하에서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조선태형령을 공포하고 헌병분대장의 즉결권한으로 적용 가능하게 했다. 그 배경에는 정신적 고통에 둔한 조선인에게는 신속하게 고통을 실감시킬 수 있는 태형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식민주의적 멸시관이 깔려 있었다.
  8.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의 시정 방침에 의거한 식민지 통치 방식. 구체적으로는 ①총독의 육해군 통솔권의 삭제와 총독 무관제 폐지, ②보통경찰제도 도입, ③언론·집회 ·출판 등에 대한 고려, ④조선의 문화 관습 존중 등을 가리키는데, 동화정책을 보다 교묘하게 추진하고 조선인 상류층 일부를 회유하면서 민족운동은 철저히 탄압하는 분열 지배 방식이 그 특징이다.
  9. 현재 중국 지린성 동부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를 예전에 ‘간도’라고 불렀다.
  10. 恵山鎮小林生,「国境憲兵と不逞鮮人」,『軍事警察雑誌』第一五巻第四号, 1921.4. “선인(鮮人)”은 조선인의 첫 글자인 ‘조(朝)’를 뺀 것으로 당시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 사용한 차별 용어이다.
  11. 朴裕河,『帝国の慰安婦』, 朝日新聞出版, 2014,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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