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자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는가?

‘위안부’피해자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군에 직접 연행된 경우, 일본군이 점령한 마을의 대표자에게 여성을 바칠 것을 명령한 결과 ‘위안부’로 보내진 경우, “공장에서 일하지 않겠어?”등과 같은 거짓 권유에 속아 ‘위안부’가 되어버린 경우, 가난때문에 부모가 팔아넘겨 ‘위안부’가 되어버린 경우 등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위안소에서는 군의 허가없이 위안소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성노예 상태를 강요당했습니다.

 

시로타 스즈코 “마리아의 찬가”

가난때문에 부모가 팔아넘겨 예기나 창기, 작부가 되어, 그 후 빚이 늘어나 가게 주인이나 군의 명령을 받은 업자들의 권유를 받고 일본군’위안부’가 된 여성들도 있습니다. 즉 원래 매춘을 하고 있었던 여성들이, ‘위안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경우입니다.

 

일본인 ‘위안부’피해자에게 종종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매춘 여성들, 즉 창기나 예기, 작부들은 모두 전차금에 묶여 폐업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매춘을 강요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예상태에 있던 여성들이,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위안부’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 봅시다.

①1925년에 유바리에서 태어난 야마우치 케이코(키쿠마루)씨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빈곤 속에서, 10살 때 도쿄의 예기 포주집에 300엔의 전차금을 받고 팔렸습니다. 빚은 계속 늘어나 1942년, ‘위안부’가 되면 군이 전차금을 대신 갚아준다고 말을 듣고 4000엔의 채무상환의 목적과,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넣어 줄 거’라는 생각에 ‘위안부’에 응모, “트럭섬”에서 장교전용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주간 아사히예능”, 1971년 8월 12일, 1973년 8월 2일; “별책 역사 독본 전기시리즈 제25권 여성들의 태평양전쟁”, 신인물왕래사; 히로타 카즈코, “증언기록 종군위안부・간호사 전장에서 산 여자 의 통곡”, 신인물왕래사, 1975년).

 

② 스즈모토 후미씨는 1924년에 시마반도의 마을에서 태어나 7살 때 팔려가 게이샤로 일했지만 2000엔의 빚을 갚기 위해 18살 때 1년 계약으로 “트럭섬”의 위안소에 갔습니다(‘고백!전쟁위안부가 살아 온 인내의 28년 길고 더운 여름에 발하는 삼대 다큐멘트 아직도 ‘후유증’을 겪으며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전쟁희생자들’ “주간 아사히 예능” 1973년 8월 12일;전게서 “증언기록 종군위안부・간호사 전장에서 산 여자의 통곡”).

 

③ 1921 년 도쿄에서 태어난 시로타 스즈코씨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여학교시절 게이샤 가게에 팔려갔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17살 때 타이완 펑후섬으로 건너간 후, 사이판, “트럭섬”, 팔라우 등으로 가, 위안소에서 일했습니다(시로타 스즈코, “마리아의 찬가”, 일본 그리스도 교단 출판부, 1971년 7월) .

 

모든 경우에서, 전차금에 묶여 폐업이 불가능한 매춘생활을 강요받던 상황속에서, 일본군’위안부’가 되면 빚을 갚을 수 있고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아, “위안부”가 되는 수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 끝에 ‘위안부’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넣어 줄 것이다” “나라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내셔널리즘을 환기시킨 것도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이샤나 창기, 작부의 여성들은 어려운 일을 강요받았을 뿐 아니라, 세상사람들로부터 혹독한 차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국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일본군은 이렇게 사회의 저변에 있던 여성들의 고통을 이용하여 ‘위안부’로 징집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위안부’가 되기 전에 그녀들이 강요당한 폐업이 불가능한 매춘생활(사실상의 성노예 상태)과 그것을 인정하고 있던 공창제도는, 당시의 일본에서도, 또한 국제사회의 기준에서 본다면 더욱 더,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공창제도하 인신매매의 관습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선택의 길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녀들은 ‘위안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빈곤한 여성들을 성노예 상태에 던져놓은 일본사회와, 그것을 묵인하고 전쟁시기에 이용한 일본군과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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