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왜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본 사이트에서는 ‘종군위안부’,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중의 호칭

일본군이 중국 상하이를 침략해 1932년에 일본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위안소를 설치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시작입니다. 이후 중국 대륙 전역,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각국에 위안소가 설치되어 일본이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이 성적(性的) 시설을 ‘위안소’, ‘군 위안소’, ‘위안 시설’, ‘주보(酒保)’ 등으로, 그 곳에 동원된 여성에 대해서는 ‘위안부’, ‘군 위안소 작부(酌婦)’, ‘특종(特種) 부녀’, ‘특수(特殊) 위안부’, ‘군 위안소 종업부(從業婦)’, 차별적인 의미를 담아 ‘삐(ピー)’, ‘위안 토인(土人)’ 등으로 불렀습니다(공문서 등에 따름).

종군위안부라는 호칭의 확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는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기억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1973년에 저널리스트 센다 카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이 출판되자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센다 씨에 따르면, 이 책은 속편을 포함해 70만 부가 팔리며 스테디셀러가 되었지만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는 자신이 만들어 낸 말이라고 합니다(2000년 인터뷰에 따름). 지금도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시기는 1971년에 일본인 ‘위안부’였던 시로타 스즈코(가명) 씨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마리아의 찬가(マリアの賛歌)』를 출판하고, 1975년에는 오키나와에 조선인 위안부로 동원된 배봉기 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이나 여성운동, 학술연구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생존자의 증언과 실태 해명

그러나 아시아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획기적인 전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이 시작되었고, 1991년에 김학순 씨가 처음으로 위안부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이 잇따랐습니다. 이른바 1990년대에 일어난 #MeToo 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증언에 의해 전쟁터에서 발생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성폭력 피해 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군 공문서가 발견되고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 공개되었으며, 학술연구에 의한 실태 파악이 진행되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라는 호칭으로 변화

 1990년대 초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각국의 지원단체로 구성)에서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논의를 거쳐 일본군 위안부’(제도), 일본군 성노예(제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①위안부라는 명칭을 붙인 당사자는 일본군으로, ‘위안’이라는 표현은 남성(일본군 장병) 시점에 따른 용어에 불과하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위안’이 아닌 위안소에서 거주·외출·폐업·거부의 자유조차 없었던 등 그 실태는 ‘성노예’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비판의 의미를 담아 따옴표를 붙여 사용하고, ②종군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어떤 국가의 군대인지 알 수 없으며, 종군에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기 때문에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일본군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기재하기로 한 것입니다.

나아가 각국의 실태가 밝혀지는 가운데 중국과 필리핀 등 점령지 여성의 경우 일본군에 의한 폭력적인 납치·감금·계속적 강간이라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식민지 여성의 사례와 같이 사기·감언(甘言) 등에 의한 연행을 통해 체계화·제도화된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구별하고자 하는 의미로 전시성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의 국제적인 확산

‘위안부’를 영어로 직역하면 Comfort Women이지만 이 문제가 국제문제로 확대된 1992년 1월 해외 미디어에서는 Sex Slaves라고 소개되었고, 같은 해 2월 UN에서도 처음으로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국제적으로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일본군 성노예제)라는 표현이 확산되었습니다. 또 ‘위안소’는 영어로 Comfort Station이지만 UN 특별보도관 게이 맥두걸(Gay J. McDougall)은 이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왜곡’이라며 Rape Center이라는 용어가 그 본질을 나타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 ‘위안부’(제도) 혹은 일본군 성노예(제) 등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후자가 사용된 예로는, 2000년에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존자의 증언과 실태 해명이 명칭의 변화를 불러일으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국제적 흐름을 반영해 본 사이트에서는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군을, 그리고 비판의 의미를 담아 따옴표를 붙여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 의한 정치개입

위와 같은 흐름을 반영해 학술연구의 장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명칭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한편 많은 논자에 의해 ‘종군위안부’라는 호칭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2021년까지는 역사교과서에서 일반적으로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위와 같은 명칭에 대해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외무성은 ‘성노예’라는 표현이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를 웹사이트에 게재하고 국제사회를 향해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외무심의관은 2016년 2월 16일 UN 제네바 본부에서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발언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 성노예라는 명칭은 국제적으로 그리고 학술적으로 정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는 2021년 4월 27일에 ‘정부 차원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종군위안부’ 혹은 ‘이른바 종군위안부’가 아닌 단순히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들어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각의 결정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이를 둘러싼 용어를 정권에서 각의 결정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는 행위이며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학술연구의 성과를 무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여성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일본군의 존재와 그 책임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종군’이라는 표현을 없애야 한다고 결정한 것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최근 일본군 ‘위안부’ 혹은 일본군 성노예와 같은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학술연구에 있어 ‘종군위안부’라는 명칭도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정치개입에 의해 이와 같은 명칭이 부정된 사실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교과서 서술에 대한 개입

위 각의 결정에 따라 교과서 서술에 대한 개입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2014년에 ‘교과서 검정기준’이 개정되어 ‘각의 결정, 그 외 방법에 의해 채택된 정부의 통일적인 견해 또는 최고재판소의 판례가 존재하는 경우 그에 입각해 서술할 것’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정부 견해를 교과서에 기재하고자 하는 교과서 서술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규정한 것이기에 그 문제성이 지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과서 검정기준’에 따라 2021년에는 교과서 출판사에 대한 압력이 가해졌으며, 이 영향으로 교과서 출판사가 이미 발행이 완료된 교과서에 대해 ‘종군위안부’의 ‘종군’을 삭제하는 등의 수정을 신청, 교과서 기술이 수정되었습니다.

나아가 정부는 2023년도부터 사용되는 교과서에 대해서도 ‘종군위안부’ 등의 용어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을 통지, 교과서 기술이 수정되었습니다.

이는 교과서 서술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며 용인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며 실증적인 연구에 입각한 교과서 서술을 정치적 의도에서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흐름을 반영함과 더불어 책임 소재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참고문헌>

千田夏光,『従軍慰安婦-”声なき女”八万人の告発』(双葉社, 1973년)

吉見義明,『従軍慰安婦』(岩波新書, 1995년)

Gay J. McDougall (지음), VAWW-NET Japan (옮김), 『戦時・性暴力をどう裁くか-国連マクドゥーガル報告全訳』(凱風社, 1998년, 증보신장판 2000년)

倉橋耕平,『歴史修正主義とサブカルチャー-90年代保守言説のメディア文化』(青弓社,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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