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일본군은 왜 ‘위안부’제도를 만들었나?

【資料1】慰安所設置を命ずる北支那派遣軍方面軍参謀長、岡部直三郎中将の指示(防衛省防衛研究所所蔵)

 

일본군은 왜 ‘위안부’제도를 만들었을까요? 일본군 공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든 이유 4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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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방지를 위해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첫째는 전쟁터에서 일본군인이 주민을 강간하기 때문에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군 시설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발상이 됩니다. 북지나 파견군 참모장 오카베 나오사부로(岡部直三郎) 중장(중령에 해당)은 일본군인의 강간사간이 빈발하자 중국인의 분노를 샀고, 그래서 서둘러 성적 위안시설을 만들라고 명령하였습니다(자료 참조).

 

이러한 얘기를 하면, 그러면 좋은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만, 이 점은 실제로는 실패하였습니다. 군’위안부’제도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일본군인의 강간사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공인하고 성적욕구를 부추기고 있으면서 강간방지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 게 처음부터 무리였던 것입니다. 또한 위안소에 끌려간 여성들은 매일 성폭력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병만연 방지를 위해서 설치했지만, 실패했다.

부대에서는 성병예방약 ‘세히코星秘膏’와 콘돔 ‘돌격일번突撃一番’을 배포했지만
성병에 걸린 병사는 많았다.

 

두번째는 성병만연 방지라는 이유입니다. 일본군 장교가 전쟁터에 있는 매춘업소에 다니면 그곳은 위생상태가 나빠서 성병이 퍼져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군이 완전히 관리할 수 있는 위안소를 만들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위안소를 군대 안으로 끌여들어 관리하면 성병방지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군의관들의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지에서 성병에 새롭게 감염되는 인원수는 군 중앙이 파악한 숫자에 의하면 1942년 11,983명, 1943년에 12,557명, 1944년에 12,587명으로 조금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중으로 갈수록 동원 병력이 증가하기 때문에 비율은 감소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신규 감염자의 절대수치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전지에서 성병에 감염되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숨겼습니다. 숨기고 몰래 스스로 치료하려고 하니까 실제 숫자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여겨집니다만, 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 성병을 방지하려고 해도 실패하고 맙니다. 군인들 중에는 이미 성병에 감염되어 있는 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위안소를 통해서 성병이 확산되어 갑니다.

‘위안’의 제공: 인권 무시의 조치

강간 방지에도, 성병감염 방지에도 도움이 안되는 위안소가 왜 늘어간 것일까? 전지에서 열악한 상황에 놓인 병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위안’ 제공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3의, 그리고 최대의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전전의 일본 남성 문화 중에 ‘위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술, 그리고 매춘이었습니다. 여자를 제공하면 된다는 식의, 군의 안이하고 인권을 무시한 발상에서 이 제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스파이 방지: 여성은 물건 취급

네번째의 이유로 ‘방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파이 방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군인이 전지・점령지의 민간 매춘업소에 다니면, 그 여성들과 깊은 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만일 그곳에 스파이가 들어가 있다면 군의 기밀이 다 새버리고 만다. 그래서 전지・점령지에 있는 민간 매춘업소에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그 대신 스파이가 들어갈 수 없는 완전히 군의 감독・통제하에 놓인 위안소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군이 ‘위안부’제도를 만들고 군 내부로 끌어들인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느쪽이든 위안소에 동원되는 여성들은 군을 위한 단순한 물건으로밖에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병사들도 성적 욕망이 부추겨져서 사랑 없는 섹스를 하게 된다는 의미에서는 인권을 무시당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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