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한국병합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目次

유효하며 합법적인가?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1은 합의에 근거했는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등의 논의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떠했을까요? 또한 한국병합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한국병합이란?

 한국병합이란, 1910년 8월 22일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이후 ‘한국’)과‘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 일본 영역으로 편입시킨 것을 말합니다. 한국병합 이후부터 일본의 패망까지 한국은 조선으로 명칭이 바뀌어 의회도 갖지 못하고 본국(일본)에서 파견된 행정관(조선총독) 직할 식민지로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병합으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제2차 ‘한일협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했습니다. 보호국이란 국제관계상 주권을 잃은 형태이기 때문에 이미 독립국이 아닌 식민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학 입장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러일전쟁 발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러일전쟁에서 한국병합까지

 우선 러일전쟁에서 한국병합에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표)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제압한 일본은 ‘한일의정
서’를 비롯한 각종 조약을 통해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갔습니다. 먼저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권리를 러시아
에게 승인받았고 동시에 영국과 미국의 양해도 얻어냈습니다. 이후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한국보호조약/을사조약)을 체결하여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한국을 보호국화한 일본은 통감부를설치하여 한국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1907년 6월에 일어난 헤이그밀사사건2을 계기로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내정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통치기관으로서 통감부를 재편·확대해 나갔습니다.

한국병합 조약은 정말‘합의’였는가?

 그러던 중 일본 정부는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 후 내정과 외교 양 측면에서 병합의 시기를 노리다가 1910년 초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계엄 태세 속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멸망시키고 일본으로 편입시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한국 황제가 한국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대일본제국 황제(천황)에게 양도하고 천황이 이를 승낙해 한국을 일본으로 편입한다고 쓰여 있습니다.3 한국병합이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바로 이 조약의 기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약이 체결된 경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합의’는 위태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4 이 조약은 일본이 준비한 안을 한국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서 체결된 것으로, 한국 측의 요구 중 받아들여진 것은 퇴위하는 한국 황제의 칭호 변경뿐이었습니다. 물론 경위나 방식이 어찌 됐건 결국 한국 측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억지 주장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장래의 한일 “양 국민의 집목(輯睦 : 화목)을 꾀하”기 위해 한일이 합의했다는 형식을 갖추는 것을 중시하는 한편, 만약 한국이 저항할 경우에는 위압이나 일방적 선언을 통해 편입시키는 방책도 함께 검토하고 있었고 실제로 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러한 의도를 드러냈습니다.5

해방 후의 대립 : 합법·유효 vs 불법ᆞ무효

 해방 후 한일교섭(1951~1965. Q17 참조) 때 한국병합의 불법성을 지적한 한일 구(舊)조약 무효론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이 “병합은 합법, 유효”하다고 주장한 데 반해, 한국은 “원천 무효”, 즉 체결 당시부터의 무효·불성립을 주장하여, 한일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그 결과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서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제2조)라고 규정되었습니다. 한국병합 이전의 조약 및 협정이 언제부터 무효인지를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애매한 문구로 타결하고 말았습니다.

쟁점은 보호조약의 유효성

 한일 구 조약 무효론의 쟁점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한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이 유효한지 아닌지입니다. 만약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면 이 조약에 의거한 일본의 한국 보호지배는 위법이 되고, 또 조약을 바탕으로 체결된 ‘한국병합조약’ 또한 무효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1905년 이후 40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지배는 단순한 군사점령(그래서 ‘강점’이라 부름)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일교섭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보류해버린 이 문제에 다시 불을 지른 것은 1991년부터 시작된 북일교섭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국제법 학자들과 함께 제2차 ‘한일협약’을 비롯한 한일 구 조약의 유효성에 관한 논쟁을 10년여에 걸쳐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논점이 된 것은 크게 나눠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 외교권 접수라는 주권의 위양이 황제의 비준서 없이 가능한가 등의 조약 형식의 문제입니다. 둘째,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 측 대표에게 가한 강압 행위가 조약 무효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논점은 제2차 ‘한일협약’ 체결 직후 이미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군이 군사연습을 하며 위협하는 가운데, 특파대사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 체결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강압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작성한 복명서(復命書) 등 많은 사료로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또 한일 연구자들이 조약 문제에 대해 논쟁할 때도 조약 체결 과정에 강압 행위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6

[표] 식민지화와 관련된 주요 조약

조약명 체결일
한일의정서  1904년 2월 23일
제1차 한일협약 1904년 8월 22일
제2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17일
제3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24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1910년 8월 22일
  1. 일본에서는 ‘한국병합’을 ‘일한병합’, ‘일한합병’ 등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이러한 용어들은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에서 합병했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조약의 정식명칭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라는 역사 용어에 유의하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다’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 ‘한국병합’이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한편 한국에서는 ‘한일합병’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본문에서 다룰 한일 구舊조약 무효론의 입장에서 ‘강제점령/강점’도 널리 쓰인다.
  2.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황제의 특사가 파견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국제 여론에 알리고자 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협약 위반을 구실로 한국 황제 고종의 책임을 추궁했다.
  3.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제1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 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제2조).
  4. ‘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무장 항일세력의 의병전쟁과 같은 대규모 저항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병합 단행을 위해 경비 태세를 강화하고 한 해 앞둔 1909년에는 의병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소탕작전인 ‘남한대토벌’을 실시한 결과 한국병합 때에는 한반도 내에 무장저항세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6-4 참조)
  5. 海野福寿編,『韓国併合始末 関係資料』, 不二出版, 1996.
  6.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강압 행위가 국제법상의 조약 무효 원인에 해당하는지 여부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법은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최종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른바 무차별 전쟁관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법에 따르면, 국가를 대표하는 개인에 대한 강압의 결과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가 되지만 국가에 대한 강압은 전쟁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유효로 간주된다. 구 조약 무효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역사학이 축적해온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앞으로 국제법학이 이 사례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심화시켜 나갈지 향후 연구 성과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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