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피해 여성들은 국민기금을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검토”의 윤곽은 1994년 6월에 출범한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 때1 드러났습니다. 같은 해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폭넓은 국민 참가의 길”을 탐구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민간기금을 통한 해결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 안에 대해 많은 피해자들이 반대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19일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발족되었습니다.

 국민기금은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한 “쓰구나이(償い) 사업”으로서 1 국민기금을 원천으로 하는 “쓰구나이(償い)금” 지급, 2 총리의 “사과 편지” 전달, 3 정부자금으로 의료복지 지원사업 등을 하고 나서 2007년 3월에 해산했습니다.(‘쓰구나이’에 대해서는 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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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자의 증언을 통해 본 피해 여성들의 반발

  피해자들은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는 해결되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쓰구나이(償い)금”은 국민의 기금으로 지불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의 편지를 건네겠다는, ‘조건부 사죄’를 제시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반발을 산 것입니다.

 ‘관부재판2을 지원하는 모임’의 일원인 하나부사 에미코는 일본 정부의 ‘민간기금 구상’이 처음으로 『아사히신문』 1면에 실린 1994년 8월 19일 아침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위안부’ 원고 이순덕 할머니가 (…) 본인 심문 사전 미팅을 위해 전날부터 우리 집에 묵고 있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내가 신문을 보여주며 “아, 일본 정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네요”라고 하자, 할머니들과 함께 한국에서 온 광주유족회의 이금주 씨가 한국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순덕 할머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화를 내며 “난 거지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모은 동정금은 필요 없어!”(일본어로 : 번역자 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 왜 할머니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까. 그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입관도 없었고 할머니에게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며 우리들 자신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까지 1년 반 동안 할머니는 일본을 왔다갔다 했는데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이순덕 할머니가 일본어로 말했다는 건 우리 들으라고 한 것이니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3

이순덕 할머니

 그 후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회원들 사이에서 “피해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건 피해자에게 엄청난 모욕이다”라는 의견과 “무라야마가 총리니까 가능한 일이다, 지금밖에 없다”라는 의견으로 나뉘어 몇 번이나 비슷한 언쟁이 벌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국민기금 관계자들 중에는 운동단체가 피해자들에게 받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 문장을 보면 피해자 본인의 강한 반대의사에 오히려 운동단체 쪽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송신도 할머니가 처음 한 말 :“난 반대야”

송신도 할머니

 이순덕 할머니가 보고 화를 낸 1994년 8월 19일자 『아사히신문』에 일본에 사는 유일한 ‘위안부’ 피해자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던 송신도 할머니의 코멘트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코멘트는 <재일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일원이었던 필자가 직접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들은 내용입니다. 그때 필자도 할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그리고 필자 스스로도 민간기금 구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할머니에게 그 내용을 담담히 전화로 알려드렸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할머니가 가장 먼저 한 말이 “난 반대야”, “국민한테 돈을 뜯는 게 아니라 정부가 해야 돼.”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도 하나부사 에미코와 마찬가지로 “그런가. 반대하시는구나”라고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4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피해자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열린 <민간기금, ‘위안부’들은 납득하는가?!>라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모두 굉장히 분노하며 반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국민모금을 모은 ‘위로금’을 받을 정도라면 이대로 죽는 게 낫다. 내가 죽어도 여기 있는 젊은이들이 내 뜻을 이어줄 것이다”라고 발언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5

피해 여성의 갈등과 고통

다큐멘터리 <기억과 산다> 포스터. 포스터 속 사진은 강덕경 할머니(촬영 : 안세홍)

 그 후 피해자들은 여러 의미에서 상처받았습니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그 돈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받아라, 받지 말아라 등의 말을 들으면서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그렇게까지 굴욕적이라고 호소한 국민기금을 저지하지 못하고 그 후의 혼란 속에서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에 대해, 지원자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민기금이 발족되기 전부터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직접 반대의사를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본 정부로서는 이 이상은 무리다”라는 판단하에 “국민의 모금을 모아 전달한다”라는 방법을 관철한 국민기금이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국민기금에 돈을 낸 사람들의 성의까지 상처를 입힌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しかし、基金発足前から被害者たちが来日して直接反対を訴えても耳を貸さず、「日本政府にはこれ以上のことは無理だ」という判断のもと、「国民の募金を集めて渡す」という方法を貫いた「基金」側が、根本的な原因をつくっ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結局、「基金」に募金した人々の誠意まで傷つけてしまう結果になりました。

 앞서 소개한 하나부사 에미코는, 유족회 소송6의 원고였던 이귀분 할머니가 1996년 8월 국민기금 사무실을 찾아가 직접 항의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후쿠오카의 자기 집에서 한국에 있는 다른 할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너희들 기금 받으면 죽여버린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이순덕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책에서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국민기금 사무실에 가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한편, 돈을 받아야만 하는 할머니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 받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이귀분 할머니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여버린다는 말이-번역자 주) 부메랑이 되어 할머니에게 되돌아와 상처를 받고 있었다”라고, 하나부사 에미코는 당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7

 할머니들이 본인의 의사로 반대한 것이 아니다, 운동단체의 압력에 굴복했다, 등의 말은 스스로의 판단력과 의사를 지닌 피해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모욕입니다.

 왜 피해자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했을까, 왜 피해자들이 “일본의 사정”을 이해해주길 기대했을까,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 물음이 아닐까요?

 국민기금의 이사였던 와다 하루키는 “한국에서는 60명, 타이완에서는 13명의 피해자가 기금사업을 받아들였을 뿐, 인정등록피해자의 3분의 2는 받지 않았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은 한국, 타이완에서는 실패한 사업이었다”라고 하며, 원인은 “국민기금으로 ‘쓰구나이(償い)금’을 지불한다는 기금의 기본 컨셉에 있었다”라고 했습니다.8

 일본 정부는 다시 한 번 피해자들이 바라는, 진정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1. 정확히 말하자면 1994년 6월 30일부터 1998년 6월까지의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현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의 연립정권.
  2. <부산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공식사죄등청구소송>의 약칭으로, 1992년 12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부산 등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및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총 10 명이 일본국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재판이다. 1998년 4월 ‘위안부’ 원고에 대해 1심에서는 승소판결이 나왔지만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패소, 2003년 3월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서 상고기각되어 패소가 확정되었다.
  3. 志水紀代子·山下英愛 編,『シンポジウムの記録「慰安婦」問題の解決に向けて―開かれた議論のために』, 白澤社, 2012, 39쪽
  4. 그날 송신도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난 반대야. 그럴 거면 조용히 그만두는 게 나아. 위로금이라고 주는 돈을 받으면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날 또 업신여기겠지. 어쨌든 국민한테 돈을 뜯는 게 아니라 정부가 해야 돼. 대단치도 않은 돈 내밀면서 위로금이다 어쩐다 하는데 누가 받을 수 있겠어. 날 업신여긴다 해도 난 내 머리로 살고 있어. 정말 성의가 있다면 돈을 주든 사죄를 하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제대로 사죄하지 않고 대충 하면 난 절대 받을 수 없어. 본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돼. 그건 일본 정부가 정말 예산이 없으니까 이것밖에 못한다고, 사죄든 보상이든 이 이상은 어떻게 해도 힘들다고, 이걸로 봐 달라고, 지금 일본 나라는 경기도 안 좋고 이거저거 형편이 힘들다고, 제대로 사죄할 테니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단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이 말만 하면 감개무량하겠지. 속이 뻔히 보이는 돈 받고는 그런 거지 뭐 하면서 눈물 흘리느니 돈 안 받고 더 열심히 하는 게 훨씬 낫지.”
  5. 이때 일본을 방문한 강덕경 할머니, 김순덕 할머니 등 피해자들끼리 국민기금에 대해 이야기를 나
    누는 모습이 도이 도시쿠니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억”과 산다(“記憶”と生きる)>(2015)에 기록되었다.
  6.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소송의 약칭으로, 1991년 12월에 제소된 재판이다. 처음으로 본명으로 제소한 김학순 할머니가 원고의 한 사람이기도 하여 화제가 되었지만 2004년 11월에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유족회 소송을 지원했던 단체는 국민기금을 추진했다.
  7. 志水紀代子·山下英愛 編, 앞의 책, 42~44쪽.
  8. 2015년 4월 23일 <아베 수상 방미 전 긴급 심포지엄 : ‘위안부’ 문제 해결은 가능하다>에서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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