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김학순 할머니는왜 90년대에 들어서‘위안부’였음을 밝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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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김학순 할머니 등장이 준 충격

 1991년 8월 14일 서울에 살던 김학순 할머니(당시 68세, 5-4 참조)가 스스로 실명으로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1 김학순 할머니는 같은 해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위안부’ 피해자 두 명, 일본군 군인, 군속 및 그 유족들과 함께 도쿄 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 보상청구사건」)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는 많은 일본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일본 패전(1945년 8월)으로부터 46년이 지난해의 일입니다.

김학순 할머니(제공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김학순 할머니의 등장은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서 사회적 문제로 본격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1992년 1월, 군의 관여를 알 수 있는 자료를 발표한 요시미 요시아키
는,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에 오기 직전에 했던 TV 인터뷰가 “마음에 크게 와닿아 종군위안부 문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2 김학순 할머니의 제소와 증언은 많은 언론에서 다루어졌고 이후 몇 년 동안 각 TV방송국은 경쟁하듯 피해자들의 증언을 테마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했습니다.

 또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지원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한국, 필리핀, 타이완, 북한, 중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네덜란드인 포함)와 성폭력 피해자들은 잇달아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밝히면서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이 시작되었고, 아시아 각국에서는 피해자와 그들의 재판을 지원하기 위한 시민운동도 벌어졌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 여성들은 반세기 가까이 침묵해 왔는데, 왜 1990년대 들어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까요?3

1990년대 이전 : 일본에서는 문제는 알려져 있었지만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1990년까지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위안부’는 소설(다무라 타이지로의『위안부 이야기(春婦伝)』, 1947. 『메뚜기(蝗)』, 1964. 오미가와 준페의『인간의 조건(人間の条件)』6부작, 1956~1958 등)과 영화(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春婦伝』, 1965. 고바야시 마사키감독의 『인간의 조건』, 1959~1961 등)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우먼리브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제기된 적도 있었고,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인 시로타 스즈코(가명)의 수기 『마리아의 찬가(マリアの賛歌)(』 1971)도 출판되었습니다. 특히 센다 가코의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1973)4는 후속편까지 포함하여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위안부’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에도 김일면의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1976), 오키나와에 살던 조선인 피해자 배봉기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沖縄のハルモニ]』(야마타니 테쓰오, 1979)와 논픽션 『빨간 기와집[赤瓦の家]』(가와다 후미코, 1987)5, ‘아시아 여
성들의 모임(アジアの女たちの会)’의 회보 『아시아와 여성해방(アジアと女性解放)』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는 일본사회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거나 역사학 연구의 테마가 된 적은 없었고, 또한 여성운동의 중요 과제로 간주되지도 못했습니다. 시로타 스즈코와 배봉기 할머니, 이 두 피해자가 일본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 : 일대 전환이 일어난 한국의 여성운동과 김학순 할머니

 이와 같은 상황을 전환시킨 것은 1987년 6월항쟁 등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한국의 여성운동이었습니다. 1990년대 한국의 여성운동이 ‘위안부’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 속에서 경찰에 의한 여성활동가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고 진상규명 등을 위해 싸워온 경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6

 이러한 가운데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당시 이화여대 교수)은 1980년대부터 ‘위안부’의 흔적을 찾아 각지를 돌며 취재를 했습니다. 1990년1월 그 기록을 모아 『한겨레』에 「정신대 취재기」라는 제목의 연재기사를 실어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같은 해 5월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6월 일본 국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과 관련해 ‘위안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노동성(현 후생노동성) 국장이 “(위안부는) 민간 업자가 데리고 다녔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답변에 한국 여성운동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같은 해 11월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정식 결성되었고 윤정옥은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정대협 결성 당시 한국에서의 ‘위안부’ 문제는 운동단체는 생겼지만 ‘피해자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이 1991년 8월의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남편도 아들도 죽고 혼자 살다가 서울에서 원폭 피해자 여성과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에게 본인이 ‘위안부’였다고 말하자 정대협에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불행은 위안소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증인이 여기서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7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있는 증인이 여기 있다’고 외친 역사적 증언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단체와 여론이 형성되어 안심하고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본,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 6월 이후의 일본정부의 답변과 대응이 ‘위안부’ 문제의 사회적, 국제적 공론화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의 민주화, 냉전의 붕괴, 그리고 페미니즘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도 1986년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 붕괴, 1987년 타이완의 계엄령 해제 등으로 민주화가 진전되었고 1989년에는 세계를 둘로 나누고 있던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세계적 규모의 과거청산운동이 벌어졌습니다.8 동시에 여성의 인권옹호를 위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을 위한 페미니즘이 세계 각지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인권회의에서 “여성의 인권”이 처음으로 명기되었고, 같은 해 12월 UN총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철폐선언’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제4회 세계여성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렸고 1998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규정(ICC규정)에 “강간, 성노예, 강제매춘, 강제임신, 강제중절” 등은 “인도에 대한 죄”임이 명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시아의 민주화, 세계적 규모의 과거청산운동과 페미니즘의 약진으로 인해 아시아 등지에서 전시 성폭력으로 고통 받은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져갔습니다.        

  1. 상세한 증언 내용은 김학순,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 한울, 1993)을 참조하기 바란다.
  2. 吉見義明,『従軍慰安婦』, 岩波新書, 1995, 2쪽.
  3. 金富子,「日本の市民社会と『慰安婦』問題解決運動」,『歴史評論』第761号, 2013.9.
  4. 한국어판은 『종군 위안부』(센다 가꼬오 지음, 이송희 옮김, 백서방, 1991.)
  5. 한국어판은 『빨간 기와집』(가와다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
  6.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경찰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여성활동가들에게 성고문을 자행했는데, 1986년 피해 여성인 권인숙이 성고문 사건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여성단체들은 이 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한층 진전시켰고 1987년에는 훗날 정대협 결성의 모체가 되는 한국여성운동연합을 결성하였다.
  7. 植村隆記者,「かえらぬ青春 恨の半生日本政府を提訴した元従軍慰安婦·金学順さん」,『朝日新聞』1991.12.25.
  8. 1990년대에는 아시아뿐 아니라 남부 아프리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포함한 과거청산 및 극복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歴史と責任』(金富子·中野敏男 編著, 青弓社, 2008),『「植民地責任」·論脱植民地化の比較史』(永原陽子 編, 青木書店,2009)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1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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