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한일청구권과 “위안부”문제

目次

한일청구권협정이란 무엇인가?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 제1조에는 일본이 한국에게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실시할 것이 명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조 제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일조약 비준서 교환 1965년 12월 18일

경제협력은 보상금인가?

 우선 이 협정 제1조에 명기된 일본의 대한(對韓)경제협력은 결코 배상금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문에는 한국의 청구권과 경제협력과의 관계가 전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이 자금에 대해 ‘청구권의 대가’나 ‘보상금’, 또는 ‘배상금’이라고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1

 예를 들어 한일청구권협정 등을 심의한 1965년 11월 5일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은 “이 경제협력의 문제는 주로, 새로이 발족하는 한국이라는 것에 대한 축의금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겠지만 훌륭히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청구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협정 제2조 제1항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이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한국의 대일청구권 내용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일본이 한국의 분리 독립에 수반되는 처리를 할 필요가 생긴, 이른바 전후 처리적 성격을 지닌다”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합법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후 처리”라는 말입니다. 이 협정이 체결된 후 노동성, 대장성, 후생성 등이 소멸시키고자 했던 한국의 “재산, 권리, 이익”에 해당하는 개인청구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편 저금과 미불 임금 등, 식민지 당시의 법률 체계에서도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금전적 처리로, 당시의 법률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2 청구의 범주를 이런 식으로 설정하면 ‘위안부’ 문제 등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 사항은 포함되지 않습니다.3

 일본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은 위와 같은 범주 이 외의 모든 청구를 “일종의 ‘트집’을 잡는 것과 같은 권리”라고 하며 ‘청구권’ 속에 포함시켜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습니다. 한편 한국은 한일국 교정상화 이후에 제기된 청구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쟁범죄 피해까지 포함한 모든 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지금까지 공개된 외교문서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외교보호권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대일청구권 처리 방법에 대해서 일본 외무성은 ‘외교보호권’ 포기만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외무성의 설명에 의거해 살펴보겠습니다.

 외무성 설명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외교보호권이란 자국민이 입은 피해를 국가 자체의 권리 침해로 간주하고 그 상대국에게 청구하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말합니다. 즉 외교보호권은 사인(私人)이 아니라 국가가 가지는 권리입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사인을 위해 그 대리인 자격으로 상대국에게 외교보호권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외교보호권을 제기할지 여부는 국가의 재량으로 결정됩니다. 어떻게 하면 청구가 충
족되었다고 판단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국가입니다. 그러니까 외교보호권은 자국민의 권리 침해를 국가가 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국가의 재량으로 행사하는 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외교보호권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베리아 억류 문제 등과 관련하여 일본의 사법부와 정부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청
구권협정에서는 국제법의 주체로서의 국가가 외교보호권을 포기하면 그 국가의 범주를 넘는 사인의 권리 행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었습니다.

결국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김종필 특사 일본 방문, 1962.10~11.(한국 정부 공개문서, 등록번호 726, 172~173쪽)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한일 양국이 외교보호권을 포기함으로써 사인의 권리까지 소멸했는지 여부를 애매하게 규정한 채로 상대국 또는 상대국 국민의 재산을 각자 처분해도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일본의 국내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1965년 12월 17일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 실시에 수반되는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법률로 처리된 것은 ‘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쟁범죄 피해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 법률체계에 의거한 한국인의 우편 저금과 미불 임금 등 “재산, 이익, 권리”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개인 보상을 거부했는가?

 1961년 5월 10일 일반청구권 소위원회에서 한국은, 한국인 개인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미불 임금 등을 지불하고 싶다는 일본 측의 제안을 거절하고 “지불 문제는 한국 정부의 손으로 처리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을 가지고 한국 정부가 개인보상을 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은 오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이때 일본이 지불하겠다는 것은 미불 임금과 우편 저금 등 식민지 시기의 법률체계에 의거한 채무 이행에 불과합니다.

 둘째, 이 제안은 한국인 개인이 증빙자료를 제시해야만 지불하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고, 한국 측의 청구액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했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제안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셋째, 이 제안이 나오기 전의 외교문서를 보면 일본은 이 ‘채무 이행’에 대해서조차 소극적이었습니다.4 일본의 방침이 이미 ‘경제협력방식’을 통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 주 요인입니다. 즉 일본은 청구권 문제를 뒤로 미루고 과거의 문제에 관한 개인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굳힌 상황에서 위와 같은 제안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논의된 적 없는‘위안부’피해

 그리고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교섭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외교문서에 딱 한 군데 관련 언급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한국 측 대표가 “일본 혹은 그 점령지에서 돌아온 한국인의 예탁금”을 논의하는 문맥에서 ‘위안부’의 사례를 거론한 것에 불과하며 ‘위안부’ 피해에 대한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침략전쟁으로 인한 ‘위안부’ 피해에 대한 역사적 책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1. 한일청구권협정 제1조에는 일본의 대한경제협력에 대해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2. <한국의 대일 청구 요강>제1항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된 지금(地金)과 지은(地銀) 반환을 청구한다. 제2항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대(對)조선총독부 채무 변제를 청구한다. 제3항 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으로부터 이체 또는 송금된 금원(金員) 반환을 청구한다. 제4항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在日) 재산 반환을 청구한다. 제5항 한국 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 변제를 청구한다. 제6항 한국인(자연인 및 법인)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인(자연인 및 법인)에 대한 권리 행사에 관한 원칙. 제7항 전기(前記) 제(諸)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생긴 제(諸) 과실(果實) 반환을 청구한다. 제8항 전기 반환 및 결제는 협정 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늦어도 6개월 이내에 완료할 것.
  3. 한일기본조약 등 한일청구권과 함께 체결된 여러 조약에도 일본이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한다거나 사죄한다는 표현은 전혀 없다.
  4. “외무성이 회담에서는 비교적 문제가 적은, 예를 들어 미불 임금과 같은 문제부터 먼저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 것에 대해, 대장성은 미불임금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는 이미 받은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런 문제부터 들어가면 한국 측에게 부당한 희망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8항목 순서대로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는 식으로 진행해 나가는 것이 교섭의 테크닉으로 유리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北東アジア 課,「請求権問題に関する大蔵省との打合会」1961.2.6. 외무성 개시기록, 문서번호 1350, 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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