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배상 문제는 해결됐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지은 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배상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라는 기본자세를 지금껏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의 원형을 만든 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년 9월 8일 조인, 이듬해 4월 28일 발효)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정식으로 종식시키고, 배상 방침 등을 정하고, 일본과 연합국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참가한 국가 대부분이 배상을 포기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또 조약의 내용과 체결 방식이 그 후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웹사이트에서

目次

‘일본은 배상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의 전환 : 냉전의 논리가 우선되다

일본의 패전 직후 대일(對日)강화의 기본 원칙은 훨씬 엄격했습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수락한 포츠담선언(제11항)에는, 일본의 통상적인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산업과 배상을 위해 필요한 정도의 산업은 남기지만, 전쟁을 위한 재군비가 가능할 것 같은 부분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이 방침에 근거해 일본 패전 후, 미국은 배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그 조사단의 첫 보고(1945년 12월)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실제로 중간배상으로서 군수산업 설비 등의 철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서서히 배상 방침이 완화되면서 1948년 5월에 이르자 군수산업 설비 등의 철거를 중단해야 한다고 결정되었습니다.1

 미국 조사단의 보고 및 성명 내용이 이렇게 바뀌게 된 이유는 냉전이었습니다. 일본에게 과도하게 배상을 부담시키면 경제부흥이 늦어지고 미국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할 뿐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인 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일본을 경제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조속히 타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국제사회의 자본주의 진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냉전의 논리를 갑자기 가속화시킨 것은 중국대륙의 내전 종결로 인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1949)과 한국전쟁(1950~1953)이었습니다. 중국대륙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갖춘 나라가 탄생하면서 자본주의 진영인 중화민국(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참전하는 국제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동아시아는 세계 냉전문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본을 아시아의 자본주의 모델국으로서, 사회주의가 더 이상 확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반공의 방파제”로 만들자는 구상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성격 : 무(無) 배상과 경제협력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은 연합국이 모두 참여하는 형식의 전면 강화보다 우선은 가능한 국가만 참여하는 단독 강화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5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대일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서명을 거부했고, 구 영국령 인도와 버마는 회의 출석을 거부했으며, 중국의 양
정부(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와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제14조)에서는 지금 일본의 경제 수준으로는 연합국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할 수 없으니 일본군에게 점령당해 손해를 입은 국가들 중 금품이 아니라 일본인의 노동력으로 배상 받기를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개별적으로 교섭해도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연합국은 배상을 모두 포기한다는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이 조항에 근거하여 연합국 중 46개국이 배상을 포기하였습니다.(표1)

【표1】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배상

참가국 연합국 중 46개국(미국, 영국 등) 배상 포기
필리핀, 남베트남, 인도네시아 배상(=경제협력, 무역)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서명 거부
소련은 일소공동선언(1956)에서 배상 포기
비참가국 버마(참가 거부) 강화회의 후 배상협정(=경제협력, 무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타이완)
중일공동선언(1972)에서 배상 포기
1952년 화일(華日)기본조약에서 배상 포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일조약(1965)에서 “경제협력”
아직 일본과의 국교 없음

 참가국 중 필리핀(구 미국령), 남베트남(구 프랑스령), 인도네시아(구 네덜란드령)만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의 방침을 기준으로 하여 훗날 개별 교섭을 통해 배상협정을 체결했습니다.2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배상을 희망했지만, 결과적으로 배상 권리를 포
기했습니다. 비참가국 중에서도 버마와는 배상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생산물을 통한 배상도 포함되는 등 모든 경우에서 “배상”은 명목일 뿐, 실제로는 경제협력 또는 무역이었으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없었습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왜 참가하지 못했는가 : 중국, 타이완, 남북한

중국 대륙과 타이완, 남북한 사람들은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다대한 고통과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피해국들은 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을까요?

 우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타이완) 참가에 대해서는 전자를 지지하던 영국과 후자를 지지하던 미국 사이에 의견이 갈라져서 결국은 양쪽 모두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후 중화민국
(타이완)은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같은 날에 체결된 화일(華日)기본조약에서 배상을 포기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국제정세의 힘 관계 속에서 1972년에 중일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배상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남북한 양 정부는 각자의 입장에서 대일강화회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우선 남측의 입장을 살펴보면, 한국전쟁 전의 남조선 과도정부 및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배상은 전승국이 요구하는 전비(戰費)배상도 보복 조치도 아닌 “희생의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의 이성적 요구”라고 정의내린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3 전승국과는 다른 입장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의 이념을 제시한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관점도 작용하여 당시 이승만 정부는 대일강화회의 참석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일본과 영국이 반대했습니다.4 일본은 한국이 참가하면 재일조선인에 대한 배상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논리로 반대했습니다. 영국은 중국 문제도 있고, 대일강화에서 구 식민지의 지위는 구 종주국의 지위에 준한다는 식민지주의 논리를 제기했습니다. 이리하여 한국은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단독강화에 반대하며 참석 의사를 표명했습니다.5 일본의 침략에 맞서 무장투쟁으로 싸웠고 조선 인민들이 크게 희생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일강화회의에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역시 초대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분단된 동아시아 국가들은 냉전 질서 속에서 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강화조약에서는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의 배상에 대해서는 논급되지 않았고, 재산 처리 방식 등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 각자 일본과 직접 논의하여 정하도록 규정된 정도였습니다.(제4조 a) 따라서 일본이 구 식민지에 끼친 피해의 배상 문제는 뚜렷이 정해진 바 없이 강화조약에서는 ‘청구권’이라는 틀만 설정된 채 이후의 양국 간 교섭으로 넘겨졌습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각국에 대한 배상과 경제협력은 1950년대 후반 이후에 실시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고도 경제성장기에 들어선 단계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의 배상과 경제협력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재진출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에서는 청구권은 서로 포기하고 경제협력을 하는 것으로 정해졌는데,8-3参照) 이러한 방향성은 이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그 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전후 일본의 배상 방식을 크게 좌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폴리 보고(1945년 12월 중간보고, 1946년 11월 최종보고. 대일배상 담당 Edwin W. Pauley의 이름을 땀)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생산 능력을 국내 수요에 맞출 정도로 감퇴시키고 전시 잉여생산력을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들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스트라이크 보고(1947년 2월 제1차, 1948년 3월 제2차 보고. 해외조사 상담소장 Clifford S.Strike의 이름을 땀)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자립과 미국의 재정적 부담 회피를 중시하는 내용으로 바뀌며, 최종적으로는 맥코이 성명(1948년 5월, 극동위원회 미국 대표 F.McCoy의 이름을 땀)에서 군수산업 설비의 철거 중지가 선언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참고문헌 중 『昭和財政史』를 참조하기 바란다.
  2. 이 중 인도네시아는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고 나중에 개별적으로 평화조약과 배상협정을 체결했다.
  3. “특히 여기서 주의를 환기해야 할 점은 조선의 대일배상청구는 전승국이 패전국에 대해 요구하는, 즉 승자의 손해를 패자에게 부담시키는 전비 배상의 이념과는 다른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대일통화보상요구의 관철」, 『조선경제신보』 조선은행조사부, 1948, I-334쪽). “우리 대한민국의 대일배상청구의 기본정신은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라 희생의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의 이성적 요구에 있다.”(『대일배상요구조서』 1949.5.)
  4. 金民樹,「対日講和条約と韓国参加問題」,『季刊国際政治』, 2002, 131.
  5. 소련 등에 ‘대일단독강화조약안에 대한 조선 인민의 태도’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냈다. (1951.6.23. 일본어판은『新時代』II-9, 1951에 수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외관계사I』, 사회과학출판사, 1985, 9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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