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헤이트 스피치와 식민지 지배와의 관계는?

최근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문제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재일조선인에게 공공연히 “죽이자”, “일본에서 내쫓자”라고 외치는 배외주의자 집단이 나타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유엔의 인권 관련 기관으로부터 대책을 강구하라는 요구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만, 규제에 대해서는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1여러 가지 관점으로 논의할 수 있는 문제지만, 이 글에서는 역사적 관점으로써 ‘헤이트 스피치’와 그 기초를 이루는 인종차별(피부색 등 외형적인 면뿐 아니라 민족이나 출신국 등을 이유로 하는 차별까지 포함하는 개념)과
식민지 지배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目次

헤이트 스피치의 무서움 : 증오의 피라미드

 우선 ‘증오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다음 그림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림1】증오의 피라미드

미국의 유대인 단체가 반인종차별 교재로 보급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피라미드의 모든 층에서 편견에 근거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층 위로 올라갈수록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가 심해지고, 위층의 행위는 아래층의 인식 및 행위를 발판 삼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피라미드가 무서운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견에서 집단 학살까지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문제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그림은 원래 독일의 유대인 박해와 대량학살(이른바 홀로코스트)의 역사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에서는 유대인을 ‘해악’, ‘적’, ‘배제해야 할 사람들’로 간주하는 사상과 언론이 확대되고 각지에서 차별사건과 폭력사건이 횡행했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유대인들의 시민적 권리가 박탈되고 결국에는 대량 살육으로까지 이르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의 전쟁범죄를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전쟁 중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는 평시의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 잔학행위도 ‘인도에 대한 범죄’라는 개념으로서 전쟁범죄로 규정되었고, ‘유엔헌장’(1945)과 ‘세계인권선언’(1948)에서 반인종차별이 명기되었으며, ‘제노사이드조약’(1948)도 제정되었습니다. 모두 인종차별이 이렇게까지 막대한 희생을 낳는다는 것에 대한 반성의결과였습니다.2인종차별의 엄청난 피해는 전후 위와 같은 반인종차별의 국제적 규범을 탄생시켰습니다.

식민지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겠지만, 서양의 마이너리티 집단만이 인종차별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13-3참조)에 쓰여 있듯, 특정 민족이나 인종 집단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는 가해/피해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가 가능했고 집단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비대칭적 관계성이 노예제가 철폐된 후 혹은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에도 인종차별이라는 형태로 계속 남은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정치철학자 한나아렌트3는 전체주의(나치스 독일과 같은 정치체제의 총칭)의 원천의 하나로 인종차별과 관료제가 결합된 식민지 지배를 꼽았고, 작가이자 정치가인 에메 세제르4が는 이미 나치즘 이전부터 비유럽인에 대해서는 “인도에 대한 죄”와 같은 행위가 자행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종차별은 식민지 지배라는 상황에서 더욱 가혹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간토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과 르완다의 제노사이드

 때로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헤이트 스피치’와 식민지지배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식민지 지배하의 ‘헤이트 스피치’로 인한 학살의 사례로, 우리들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례는 바로 간토대진재(1923)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입니다.5그 전에 이미 3·1운동(1919)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적
의를 품고 있었던 관헌 및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불령선인’(반항적이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뜻의 차별용어)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금세 ‘불령선인’이 “불을 질렀다”,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쳐들어온다” 등의 유언비어가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자료 참조.  신문도 조선인 ‘습격’ 소문을 부채질했다. 위의 자료는 모두 1923년 9월의 일본 신문의 기사 제목으로, 오른쪽부터『報知新聞』『時事新報』『東京日日新聞』『上毛新聞』『下野新聞』이다.)

이윽고 계엄령이 시행되고 군사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이 수천 명의 조선인을 살해했습니다. 이 학살사건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지금껏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재일조선인 사회는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계속 기록해 왔습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인터넷 상의 글쓰기를 포함한 ‘헤이트 스피치’는
단순한 언론행위(스피치)를 넘어 실제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과거 식민지 지배하에서 형성된 집단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현대의 ‘헤이트 스피치’가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 대량학살이 자행된 사례로, 르완다의 제노사이드(1994)를 들 수 있습니다. 1994년에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습격받은 사건을 계기로, 소수파 투치인들에 대한 다수파 후투인들의 증오와 공격이 급속도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 등 언론과 지방의 지도자들이 투치인들을 “적”, “침략자”라고 하며 “바퀴벌레”, “죽이자”, “뿌리를 뽑자” 등을 외치면서 증오와 공격을 부채질했고, 이것이 일반 민중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져 100일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5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6。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래 후투와 투치를 엄격히 구별 짓고 두 민족을 차별 대우한 것은 벨기에 식민지통치기구였다는 사실입니다. 식민지 정부는 비교적 백인에 가까운 인종이라 판단한 투치인들을 우대하고 신분증 제도를 통해 명시적으로 민족을 구별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식민지말기에 다수파인 후투인들이 사회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수 많은 투치인들이 공격당하고 르완다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도 벨기에 행정당국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민족 간의 대립, 갈등을 유도했습니다.7 이렇듯 현대의 분쟁과 제노사이드의 씨앗은 식민지 때 이미 뿌려진 것입니다.

반인종차별과 반식민지주의

 이러한 식민지 지배와 인종차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앞서 말한 전후의 반인종차별에 대한 국제적 규범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홀로코스트뿐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도 함께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의 초안 작성 과정에는 이제 막 독립한 구 식민지 출신자들이 활약했고, 소련은 반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식민지 주민에 대한 인권보장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8‘제노사이드’라는 말의 창시자인 라파엘 렘킨은 독일의 헤레로인 학살(13-3참조)과 벨기에령 콩고의 잔학행위까지 염두에 두고 이 개념을 만들었습니다.9。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에는 아직 서양 중심의 국제사회가 명확히 반식민지주의를 표방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반인종차별과 반식민지주의가 확실히 연결된 것은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던 1950~1960년대였습니다. 식민지주의는 어떠한 형태든 모두 조건 없이 끝내야 한다고 제창한 ‘식민지독립부여선언’(1960년 채택)에서는 그 전문(前文)에 인종차별 없는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명기해 놓았습니다. 또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제창한 ‘인종차별철폐조약’(1965년 채택) 전문에도 식민지주의 비판의 흐름과 ‘식민지독립부여선언’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헤이트 스피치’와 인종차별 문제는 단순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역사적 관점, 특히 식민지주의 역사에 그 뿌리가 있음을 명확히 인지해야 합니다.(이타가키 류타)

 

  1. 사회권규약위원회(2013), 자유권규약위원회(2014), 인권차별철폐위원회(2014)에서 제시된 견해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적 표현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 당사자에 대한 중상비방이나 부정도 ‘헤이트 스피치’ 문제의 하나로 함께 지적하고 있다. 각 견해는 Fight forJustice ブックレットI『「慰安婦」·強制·性奴隷 あなたの疑問に答えます』(お茶の水書房,2014, 146~148쪽)에 수록되어 있다.
  2. 아직 익숙지 않은 용어였던 ‘제노사이드’라는 말이 도입되었을 당시,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더불어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또 하나의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이었다.
  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06.
  4. エメ·セゼール,『帰郷ノート·植民地主義論』, 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4, 137쪽. 원문은 1950년 간행. 한국어판으로는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에메 세제르 선집 1), 『귀향수첩』(선집 2), 그린비,2011.
  5. 강덕상, 『학살의 기억 : 관동대지진』, 역사비평사, 2005. 山田昭次,『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 創史社, 2003. 山田昭次,『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創史社, 2011.
  6. Allan Thompson ed., The Media and the Rwanda Genocide, Pluto Press, 2007. 르완다 국제법정에서는 언론 책임자도 유죄판결을 받았다.
  7. 武内進一『現代アフリカの紛争と国家』明石書店、2009年
  8. 前田朗,『ヘイト·スピーチ法研究序説』, 三一書房, 2015, 405~424쪽. Johannes Morsink,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0,pp.92-109.
  9. D.J.Schaller, “Raphael Lemki-n’s view of European colonial rule in Africa”, Journal of Genocide Resea-rch, 7(4), 2005. ただし、レムキン自身は植民地主義への批判者では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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