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김학순 할머니는 기생학교 출신이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 처음 증언했을 때 전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안부’ 제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여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김학순 할머니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증언 내용을 허위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니,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겠죠?

 그들은 김학순 할머니가 기생학교 출신의 기생이고 전형적인 인신매매 케이스라는 이유로 증언을 믿지 않고 부정합니다.

目次

기생이란 무엇인가?

 그럼 기생은 어떠한 존재였을까요?

 기생을 유곽에서 일하던 유녀(遊女)와 같은 존재로 보거나 1970년대 일본인 남성의 한국매춘관광을 칭했던 ‘기생관광’1의 이미지로 보기도 하지만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a singing and a dancing girl’이라 번역되듯이 기생이란 조선시대의 관기(官妓)로서 공적인 의식과 관청의 연회에서 춤과 노래, 악기 연주를 제공하던 여성을 말합니다.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특수기능을 보유한, 지금으로 말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였습니다.

1900년대의 관기

기생학교(그림엽서)

 관기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지만 1908년에 ‘창기단속령’, ‘기생단속령’이 제정되면서 기생은 춤과 노래, 악기 연주를 전업으로 하는 존재로 명시되었습니다. 조선시대와 달라진 점은 관할 부처가 궁내부에서 경시청으로 바뀐 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기생의 예능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서울, 평양, 성천, 진주, 해주, 경주, 전주, 강계, 함흥 등이 명기를 배출하는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평양에는 기생 견습생에게 3년 과정으로 춤과 노래, 악기 연주 및 교양과목을 가르치
는 기생학교가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 관광객의 관광코스에 평양 기생의 무용을 보러 기생학교를 방문하는 것이 들어갈 정도로 평양의 기생학교는 유명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던 황진이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저항했던 논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3·1운동 때에도 많은 기생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기생을 무조건 천시한다기보다는 선망 어린, 복잡하고 다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또 1920년대에는 레코드(음반)와 영화산업이 번창하자 왕수복이나 석금성과 같은 기생 출신 가수와 배우들이 크게 활약하여 인기를 얻었습니다. 왕수복은 보통학교 중퇴 후 12세의 나이에 평양의 기생학교에 다녔습니다. 왕수복이 활약하던 바로 그 시기에 김학순 할머니가 기생학교를 다녔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2에 의하면 김학순 할머니는 1924년에 중국 동북부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사망하자 의지할 곳이 없던 어머니는 젖먹이 딸을 안고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에는 출생신고를 제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지금도 정확한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말하는 나이가 때때로 부정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고 해서 그 피해자의 증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구술사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다시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평양으로 돌아온 무력한 싱글맘은 남의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도우면서 근근이 살아가게 됩니다. 평양은 양말 제조가 활발했기 때문에 양말을 만드는 부업도 했지
만 김학순 할머니가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재혼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결혼은 특수한 기술이 없는 여성이 살아가기 위한 몇 되지 않는 선택지였습니다.

평양의 기생학교(그림엽서)

 1년 후 어머니는 딸을 예기(藝妓)집 주인의 양녀로 맡깁니다. 그때 어머니가 주인(양부)에게 40엔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딸에게 기예 능력을 갖추게해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겁니다. 당시는 집이 잘 살지 않으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또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장래가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학순 할머니는 양아버지 집에서 먹고살 수 있는 기예를 배우기 위해 2년 동안 기생학교에 다니며 춤, 판소리, 시조 등을 배웠습니다.

 기생학교를 마친 후 양부에게 이끌려 선배들과 함께 베이징까지 기생 일을 하러 갔지만 베이징에서 군인에게 납치되어 ‘위안부’가 되고, 장교에게 “처녀를 빼앗기고” 나서 그때부터 ‘위안부’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김학순 할머니는 증언하고 있습니다.3

기예를 배우는 기생들(경상남도 진주, 그림엽서)

전차금 40엔은 소액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양부에게 받은 40엔이 팔려갔다는 근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40엔은 딸을 팔면서 그 부모가 받는 전차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금액입니다. 당시 물가로 40엔은 쌀 140킬로그램을 살 수 있는 금액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70~ 80만 원밖에 안 됩니다. 1920년대 후반 조선의 전차금은 일본인 여성 약 1700엔, 조선인 여성 약 420엔 정도였으니, 40엔은 1/10에도 미치지 않는 금액입니다. 또 전차금은 일종의 고리대금이라, 미리 목돈을 받고나서 높은 이자까지 붙은 금액을 임금에서 떼어 분할상환해 가기 때문에 아무리 오랫동안 일을 해서 갚아도 빚이 줄지 않는 근대 경제학의 꼼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기득권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이 약한 입장의 피해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증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득의양양하게 증언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품성과 도덕이 결여된 행위입니다.

 또한 가난한 어머니가 좁디 좁은 선택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딸을 기생학교에 보낸 것이니 그 딸, 즉 김학순 할머니에게는 ‘위안부’ 피해를 호소할 자격조차 없다고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옳
지 않습니다. 심지어 연구자인 하타 이쿠히코조차
4 김학순 할머니의 케이스는 양부가 딸을 군에 팔아넘긴 인신매매이기 때문에 군에는 책임
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본인의 증언에서는 군인에게 납치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양부에 의한 인신매매라 하더라도 군의 책임은 면죄받지 못합니다. 당시에도 인신매매는 범죄였기 때문에 만일 김학순 할머니가 인신매매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양부에게서 그녀를 매수한 일본군은 분명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Q3 참조) 일본군이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인신매매 를 조사도 하지 않고 그 피해 여성을 ‘위안부’로서 위안소에 가둬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본군과 김학순 할머니의 어머니·양부, 어느 쪽의 책임이 더 중대하겠습니까.

  1. ‘기생관광’이란 말은 매춘을 위장하기 위해 기생을 사칭한 것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폄훼하고 경제적 격차를 이용한 인종차별주의적 명칭이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한울, 1993.
  3. Fight for Justice ブックレット1,『「慰安婦」·強制·性奴隷 あなたの疑問に答えます』, 日本軍「慰安婦」問題web サイト制作委員会 編, 吉見義明·西野瑠美子·林博史·金富子 責任編集, 御茶の水書房, 2014, 84쪽 참조.
  4. 秦郁彦,『慰安婦と戦場の性』, 新潮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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