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일본이 조선에 교육과 문자를 보급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들 중에는 아예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거나(불입학),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중퇴한 경우가 많아 그 결과 읽고쓰기를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예는 식민지기 조선에서 특수한 사례였을까요?

 

우선 조선에는 “내지”(현재의 일본)와는 달리 1945년 8월까지 의무교육제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는 1937년도까지 보통학교, 1938년도부터는 심상소학교, 1941년도부터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었습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조사결과를 살펴 봅시다(그림 1,2). 누적 그래프의 가장 아래 부분이 연령별 불취학자의 비율인데 취학경험이 없는 사람이 조선사회에 이만큼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남녀 차>가 큽니다. 20~29세를 비교해 보면 남성 불취학자가 57.1%였던 것에 비해 여성은 90.7%였습니다. 즉 여성의 10명 중 9명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재조일본인(조선에 살고 있던 “내지인”) 경우 일본인이 사는 곳에는 바로 소학교를 세우는 정책도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20~29세를 보면 재조일본인의 불취학자는 남성 0.8%, 여성 1.2%였습니다. 이것은 압도적인 <민족 차>를 뜻합니다.

 

q4-1

그림(図)1 조선인남성의 취학상황(1944년)
국민학교 초등과 졸업 이상
국민학교 초등과 퇴학
간이학교, 서당 수료
불취학

 

q4-2

그림(図)2 조선인여성의 취학상황(1944년)
국민학교 초등과 졸업 이상
국민학교 초등과 퇴학
간이학교, 서당 수료
불취학

(출전出典) 『(極秘)昭和十九年五月一日 人口調査結果報告 其ノ二』朝鮮総督府, 1945년

 

그래도 이 때는 가정이나 제도 밖 교육에서 글을 배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식자율(읽고쓰기가 가능한 사람의 비율)은 취학률보다 높았습니다. 자료 관계상 시대는 조금 어긋나지만 1930년의 국세조사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그림 3, 4). 일본어의 글자인 가나와 한글의 읽고쓰기를 조사한 자료인데 어느 쪽도 읽고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은 역시 여성이 훨씬 높게 나옵니다. 20~24세를 보면 남성이 44.3%, 여성은 85.8%입니다.

 

q4-3

그림(図) 3 조선인남성의 식자상황(1930년)
가나 및 한글 식자
가나만 식자
한글만 식자
둘 다 불가능

 

q4-4

그림(図) 4 조선인여성의 식자상황(1930년)
가나 및 한글 식자
가나만 식자
한글만 식자
둘 다 불가능

(출전) 朝鮮総督府『昭和五年 朝鮮国勢調査報告 全鮮編第一巻 結果表』1934년

 

조선은 원래 교육이 부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틀린 말입니다. 조선왕조 때에는 일본의 데라고야와 같은 서당 및 사설글방이 농촌부까지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한문을 중심으로 한 식자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15세기에 발명된 한글(훈민정음)도 한문교육의 보조수단으로 혹은 상류계급 여성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 등으로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말 이후 공/사문서에서도 한문뿐 아니라 한글도 함께 혼용되는 “국어”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었고 교육제도도 크게 바뀌어 갔습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침략을 꾀하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립학교가 탄생하여 1909년 한 해만에 무려 2천 건 이상의 설립인가가 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맙니다. 사립학교는 폐쇄 혹은 억제되었습니다. 설비를 꽤 잘 갖춘 교육시설도 “사설학술강습회”라 불리며 1년마다 인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국민으로서의 성격” 양성과 “국어”(일본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공립보통학교가 학교제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통학교 설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의 면에 한 학교가 설치된 것은 1930년대 중반이 되어서입니다. 그것도 총독부가 “세워 준” 것이 아닙니다. 교육을 요구하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토지와 건설자금을 기부하거나 이미 세워져 있었던 “사설학술강습회”를 통합하면서 만든 학교를 총독부가 인가하고 일본식 커리큘럼을 강제했다는 설명이 정확합니다.

 

의무교육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초등교육이라도 수업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의 조사에서는 지주가정의 63%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것에 비해 소작가정은 6%에 불과했습니다(全羅南道『小作慣行調査書』1923년). 따라서 취학에는 <계급 차>(빈부에 따른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남녀 차>는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요? 제도적인 요인과 사회적인 요인 모두 생각해야 합니다. 남녀공학인 보통학교의 경우 모집 정원에 남녀 차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우선 제도적인 격차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 가난한 가정의 경우 아이들 모두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그렇게 되면 보통 아들부터 학교에 보냈습니다(사회적 요인). 이러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이 합쳐져서 <남녀 차>가 생겼습니다.

 

이렇듯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 차>, <계급 차>, <남녀 차>가 맞물려서 불취학/비식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더불어 낮은 식자율을 생각할 때에는 복잡한 다언어/다문자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어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면서도 언어로서는 일본어와 조선어(다언어), 문자로서는 가나와 한자, 한글(다문자)가 불균형적으로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전한 후 남북조선에서는 일본어를 없앰과 동시에 한글식자운동(“문맹퇴치”라 했습니다)이 추진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에서는 1949년에 “문맹퇴치”가 선언되었으며(《조선교육사3》사회과학출판사, 1990), 남에서도 글을 못 읽는 사람의 비율이 77.8%(1945년)에서 41.3%(1948년), 13.9%(1954년)으로 급속도로 줄었습니다(《文教月報》49호, 1959.11》.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더라도 조선의 식민지상황은 취학이나 식자에 있어 마이너스 요인이면 이었지 플러스 요인은 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金富子『植民地朝鮮の教育とジェンダー』(世織書房、2005年)
(→한국어번역은 김부자 지음,조경희, 김우자 옮김 『학교 밖의 조선여성들  젠더사로 고쳐 쓴 식민지교육』일조각,2009년)
板垣竜太「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識字調査」(『アジア・アフリカ言語文化研究』58, 1999年)
http://repository.tufs.ac.jp/handle/10108/2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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