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결정이란?
2011년 12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제안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다시금 한일 양정부 간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때까지 ‘위안부’ 문제에 그 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명박 대통령이 왜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되었을까요? 일본에서는 이듬해의 독도 방문과 함께 퇴임 직전의 인기끌기 작전으로 보는 피상적 견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해결”을 제안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헌법재판소1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 존재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2011년 8월 30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보상 문제에 관련하여 내린 결정2은 한일협정에 관한 한국의 새로운 사법판단의 단서가 되었습니다.
결정에 이른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6년 7월 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습니다. 피해 여성들의 배상청구권 문제에 대해 한일 양국에 명백한 분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거한 해결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는 것(=부작위不作爲)은 청구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라는 주장입니다.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의 이러한 “부작위”는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일본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라고 보는 종래의 한국 정부의 해석에 근본적 수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어 대법원은 2012년 5월 24일 일본의 국가권력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제2조 제1항)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최근 10년간 한일회담문서가 점차 공개되면서 한일회담에 관한 연구와 전후보상재판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박유하의 헌법재판소 결정 비판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데 가운데, ‘위안부’ 문제를 다시 외교적 의제로 부상시킴으로써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보는 부정적 평가도 있습니다.
비판론자의 한 사람인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결정은 이후 정부로서 일본 정부에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지만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취하는 행동이 해결로 이어질 리가 없다. 실제로 그 후 ‘외교적 해결’을 위한 시도는 한일관계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帝国の慰安婦』, 朝日新聞出版, 2014, 196쪽)
물론 결정이 나왔다고 해서 바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일본 정부에게 협의 신청을 했습니다만, 일본 정부는 청구권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는 종래의 입장을 견지하며 협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다 당시 총리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습니다. 한일 양 정부는 변함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유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야말로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결정은, 개인이 피해를 보상받을 기회를 빼앗은 것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는 점, 그리고 90년대에 다시 한 번 일본 정부가 보상을 했고 상당수의 위안부가 일본의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내려진 모양이다. 무엇보다 이때의 모든 판단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과 자료에 근거해 내려졌다『( 帝国の慰安婦』, 193쪽).
즉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피해자가 개인보상을 받을 기회를 빼앗은 것은 한국 정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인식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박유하의 이러한 평가는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우선 현재까지의 한일회담 연구에서, 한일회담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의 보상 문제가 논의되었는지 여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8-3 참조)1953년 회담 때 한국 측 위원이 “한국 여자 중에 전쟁 때 해군이 관할하던 싱가포르 등 남방으로 갔다가 위안부로서 돈이나 재산을 두고 귀국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며, 점령지에서 돌아온 조선인의 “예탁금”을 논의하는 문맥에서 잠시 언급했다는 정도가 확인되었을 뿐입니다.3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피해를 보상받을 기회를 빼앗은 것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였다”라는 박유하의 말은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4
그리고 “90년대에 다시 한 번 일본 정부가 보상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의 “쓰구나이금(償い金)”이 “보상”이 아니었음은, 일본 정부뿐 아니라 국민기금 관계자들도 수차례 표명했습니다. 국민기금 부이사장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가 “이것은 배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ODA와 마찬가지로 인도적 견지에서 하는 일정의 지원협력입니다”라고 확실히 밝힌 바 있습니다.5 “쓰구나이(償い)”라는 말은 한국어로는 “보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일본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보상이나 배상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한일협정의 극복
오히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한국 정부에게 한일협정 때 “해결되었다”라는 논리로 인해 봉쇄되어 버린 식민지 지배와 전쟁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요구하는 내용이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아베 코키가 말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불법행위에 대한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법부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21세기를 ‘또 하나의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 다음의 세기에 걸맞는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 탄생한 “과거를 소환하는 조류”이자 “식민지주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21세기는 있을 수 없다는 조류의 확산”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6
실제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그때까지의 한국 정부의 자세를 똑똑히 비판했습니다. 비판의 취지는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아가 특히, 우리 정부가 직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위 피해자들의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의 실현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회복을 하는 데 있어서 현재의 장애상태가 초래된 것은 우리 정부가 청구권의 내용을 명확히 하지 않고 ‘모든 청구권’이라는 포괄적 개념을 사용하여 이 사건 협정을 체결한 것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피청구인에게 그 장애상태를 제거하는 행위로 나아가야 할 구체적 작위의무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밑줄은 인용자)
이 결정은 한국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일협정 당시 배제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호할 “구체적 작위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한국 정부에게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러니 한국 정부도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피해자들의 정의와 존엄성을 회복할 출구를 봉쇄해버린 한일협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우리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통상 법원으로부터 독립된 특별재판소다. 헌법 해석에 관련되는 사안 해결을 목적으로 1987년 헌법개정(제6공화국헌법) 때 도입되었다. 1위법입법재판권, 2대통령, 국무위원, 판사, 검사 등의 탄핵심판권, 3위헌정당심판권, 4권한쟁의심판권, 5헌법소원심판권을 가짐으로써, “공권력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한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을 침해당한 자는 (…)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법률 제68조1항).
- 헌법재판소 결정 전문은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吉澤文寿,「日韓請求権協定と「慰安婦」問題」, 西野瑠美子·金富子·小野沢あかね 責任編集,『「慰安婦」バッシングを越えて―「河野談話」と日本の責任』, 大月書店, 2013.
- 박유하의 한일회담 이해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정영환「歪められた植民地支配責任論―朴裕河『帝国の慰安婦』批判」,『季刊戦争責任研究』第八四号, 2015년 여름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 西野瑠美子,「被害者不在の『和解論』を批判する」, 앞의 책『「慰安婦」バッシングを越えて』, 138쪽.
- 阿部浩己,「日韓請求権協定·仲裁への道」,『季刊戦争責任研究』第80号, 2013年夏季号,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