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은 오용(誤用)인가?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것인데 한국에서는 당시에도 지금도 두 용어를 혼동, 오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4년 8월 5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위안부’ 보도 검증기사에서는 1990년대 초기사에서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동원되었다”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여자정신대는 전시하에서 여성을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한 ‘여자근로정신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위안부와는 전혀 다릅니다. 당시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고 기자가 참고로 한 자료 등에도 위안부와 정신대가 혼동된 채 오용되었습니다.
라고 하며 “오용”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1990년대 후반, 하타 이쿠히코는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는 “전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혼동되는 풍조가 계속되었다”라며, “일본인 여성이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된 것은 전쟁 말기인 1944년 8월부터이며, ‘여자정신근로령’(8월 23일에 공포, 시행된 칙령 519호)에 의해…… 미혼 여성이 대상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조선에 대해서는 “여자정신근로령도 한반도에는 적용하지 않았다”1(밑줄은 인용자)라고 서술했습니다.
최근 박유하도 “‘정신대’(=근로정신대) 모집은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였다. ……일본에서 행해진 제도”, “정신대도 조선에서는 정식으로모집되지 않았다”라고 하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것을 “식민지의 ‘거짓말’”3되고 있었고, 1943년 무렵에는 이미 국민학교 5, 6학년 및 졸업한 지 1, 2년 이내인 소녀들이 일본 ‘내지’의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4
『아사히신문』의 기사 내용대로 정신대는 ‘여자근로정신대’를 뜻하며, “전시하에서 여성을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한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조선에도 ‘근로령’이 공포, 시행되었을뿐 아니라 그 전부터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모집된 소녀들이 일본의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로령’이 나오기 전인 1944년 6월 경 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보내졌던 강덕경 할머니가 그 실례입니다.5 따라서 하타와 박유하의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적용되지 않았고 정신대도 모집되지 않았다’라는 주장은 중대한 오류입니다. 이 두 사람은 원전 및 출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조선인 여자정신대원 피해자들의 증언6도 듣지 않거나 읽지 않은 겁니다.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역사적 맥락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둘은 조선과 일본에서의 역사적 맥락 또한 달랐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1937년 12월 무렵부터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 위안소가 대량으로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38년 3월 경부터 조선 남부에서 여성들을 군에 봉사하게 할 목적으로 전쟁터로 동원한다는 ‘유언비어’가 발생하여 전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7 ‘유언비어’에 따르면 동원 대상은 젊은 미혼 혹은 과부인 조선인 여성으로, 하는 일은 “군인과의 성적 관계”, “군인의 위안”,8 동원의 주체는 경찰, 구장(區長), 헌병 등의 권력기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원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미혼 여성들이 늘어났습니다. 언론이 말살된 식민지 민중의 ‘유언비어’는 단순한 뜬소문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경고와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연행된 ‘위안부’ 피해자들도 같은 내용의 소문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고,が含まれ、警察・区長・憲兵などの権力機関が調査や動員主体であるとされました。そのため未婚女性は、対策として結婚を急ぐことが広まりました。言論が封殺された植民地民衆の「流言」は、危険性への警告や抵抗という意味がありました。この頃に連行された元「慰安婦」も、この噂を証言しています9 시기적으로도 본격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던 때와 겹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당시 위의 ‘유언비어’와 같은 방식으로 조선인 여성들이 모집, 동원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938, 1939년에는 ‘정신대’라는 용어가 없었을 뿐 ‘성적 위안’ 등을 목적으로 여성들이 전장에 동원되었고, 1940년대부터 ‘정신대’라는 이름의 대규모 강제동원이 자행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정진성은 당시 조선에서 “정신대는 강제동원의 대명사”10였다고 기술했습니다.
정신대와‘위안부’의 관계성 : 네 가지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그럼 ‘정신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19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와 정신대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을까요? 아래의 네 가지 증언과 자료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윤정옥은 『한겨레』에 연재했던 「정신대 취재기」(1990.1.4.)에,
1943년 12월, 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1학년 때 일제가 한반도 각지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여성들을 마구 정신대로 끌어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11
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근로령 시행 전인 1943년 12월에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로 끌어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윤정옥 본인의 증언이기도 한 이 문장은 정신대에 대한 식민지 민중들의 인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둘째,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이라는 곳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던 쓰치가네 도미노스케의 증언입니다. 쓰치가네는 순찰근무를 위해 위안소를 드나들다가 듣게 된 조선인 ‘위안부’의 말을 본인의 회
고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조선에서 종군간호부, 여자정신대, 여자근로봉사대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그래서 설마 위안부를 강요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외지로 수송되고나서 처음으로 (우리들이 : 번역자 주) 위안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조선인 ‘위안부’들은 ‘정신대’, ‘간호부’라는 말에 속아서 끌려왔다는 말입니다.
셋째, 미군 측 자료입니다. 미군의 신문 『ROUND UP』 1944년 11월30일자 기사 「일본의 위안부(JAP COMFORT GIRLS)」는,
1942년 4월 초 일본의 관헌이 조선의 평양 근처 마을에 왔다. 그들은 포스터를 붙이거나 대회를 열고 싱가폴의 후방 기지에서 근무하면서 기지 내의 시중을 들거나 병원 심부름을 하는 정신대(“WAC” organizations)를 모집하기 시작했다.13
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모집된 후 ‘위안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해방 직후인 1946년 7월 18일자 『중앙신문』은,
꽃같은 우리 동포 부녀들은 소위 정신대나 위안부라는 미명 아래 왜병의 싸움터로 끌려가 가진 유린과 혹사를 당하고 있다.14
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는데, 정신대와 ‘위안부’가 동일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 증언과 자료는 194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위안부’를 동원하는, 조선에서만 자행되었던 독자적인 징집 형태가 폭넓게 존재했다는 실태를 보여주고 있습
니다.
‘위안부’피해자의 증언에서 알 수 있는‘정신대와 위안부’동원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증언했을까요? 김복동 할머니(1926년 경상북도 출생)는 양산의 초등학교15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1년에 구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딸을 데신타이(정신대의 일본어 발음 : 번역자 주)로 보내야 하니 내놓으세요”라고 한 말에 끌려왔다고 증언하였습니다.16
황금주 할머니(1922년 충청남도 출생)는 1941년, 일본인 반장에게 “일본의 군수공장에 3년의 계약으로 일을 하러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한 집에서 적어도 한 명은 나가야 한다”라고 “은근히 협박” 당하여 식모살이 하던 집의 딸들 대신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증언에 ‘정신대’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정신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7
그리고 이상옥 할머니(1926년 황해도 출생)는 1943년에 구장이 ‘처녀공출’이라고 끌고 가서 일본군 장교에게 넘겨졌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와 이상옥 할머니의 증언은 구장이나 반장의 행정적 압력 하에 처녀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위안부’ 징집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조선인 ‘위안부’ 징집의 대부분은 10대 소녀=미혼 여성을대상으로 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등의 취업 사기 형태를 띤 유괴였습니다.(5-6참조)
앞서 살펴본 역사적 문맥을 생각하면, 1940년대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징집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혼동”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의 ‘위안부’ 징집 때 자행되었던 유괴의 한 형태로, 민중들의 눈을 통한 실상의 반영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위와 같은 정신대와 ‘위안부’와의 관계를 “오용”이라는 한마디로 치부해 버린다면 조선인 ‘위안부’ 징집의 실상을 알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秦郁彦,『慰安婦と戦場の性』, 新潮選書, 1999, 366~369쪽.
-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아사히신문』은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한 것은 “오용”이라는 결론을, 하타 이쿠히코와 박유하는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적용되지 않았고 정신대도 모집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조선에서도 적용된‘여자정신근로령’
‘여자정신근로령’(이하 ‘근로령’)은 1944년 8월 23일에 칙령 519호로 일본과 조선에서 동시에 공포, 시행되었습니다.[자료1 참조] 중요한 것은 ‘근로령’이 공포, 시행되기 전부터 조선에는 이미 여자근로정신대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에서 여자정신대는 이 법령(=‘근로령’)이 공포되기 수년 전부터 이 법령이 한정하고 있는 대상에 관계없이 여러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동원”2정진성, 『일본군 성 노예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선행 연구로는 여순주, 「일제말기 조선인 여자근로 정신대에 관한 실태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1994)가 있다.
- 山田昭次,「戦時期の皇民化教育と朝鮮女子勤労挺身隊」(山田昭次·古庄正·樋口雄一,『朝鮮人戦時労働動員』, 岩波書店, 2005.)
- 강덕경 할머니(1929년 경상남도 출신)는 국민학교 고등과 1학년 때인 1944년 6월 무렵,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도야마(富山)현의 후지코시(不二越) 공장으로 보내졌다(그 후 탈출했지만 붙잡혀 ‘위안부’로 끌려갔다). 土井敏邦,『“記憶”と生きる』, 大月書店, 2015.
- 1992년 12월, 여자정신대 피해자 10명이 ‘위안부’ 피해자 3명과 함께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관부재판)을 제기했고 이후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여자정신대원의 제소가 계속되었다.
- 藤永壮「戦時期朝鮮における『慰安婦』動員の『流言』『造言』をめぐって」松田利彦ほか編『地域社会から見る帝国日本と植民地―朝鮮・台湾・満洲』思文閣出版、2013.
- 1938년 3월 말에 경상남도 밀양, 양산 지역에서는, 16~20세의 “처녀” 및 16~30세의 과부를 강제로 끌어모아 전쟁터로 보내고 “낮에는 밥짓기나 빨래 등의 노역을 시키고 야간에는 군인과의 성적 관계를 시켰다”라고 말한 세 명이 육군 형법으로 4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藤永壮, 앞의 책.
- 1939년에 연행된 여복실 할머니(1922년생)는 “일본인이 여자를 잡으러 온다”라는 마을 사람의 소문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2』, 한울, 1997, 199쪽.
- 정진성, 앞의 책.
- 『한겨레』 1990년 1월 4일자 기사 원문에는 “1944년 12월”로 되어 있으나 이 기사를 쓴 윤정옥씨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1943년 12월”이 맞으며 『한겨레』 기사의 “1944년”이 잘못되었다는 답을 들었다.(2016년 3월 9일 필자와의 전화인터뷰)
- 土金冨之助『シンガポールへの道 下』創芸社,1977年.
- 浅野豊美,「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 1999, 64쪽.
- VAWW-NET ジャパン編, 金富子·宋連玉責任編集,『「慰安婦」戦時性暴力の実態I(日本·台湾·朝鮮編)2000年女性国際戦犯法廷の記録』, 緑風出版, 2000, 344~345쪽.
- 시기적으로 볼 때 보통학교 혹은 소학교였을 테지만 어느 쪽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김복동할머니 본인이 “초등학교”라고 증언했기 때문에 “초등학교”라고 표기했다. 김복동, 「광동,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전전하며」(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앞의 책)
- 위와 같음.
- 황금주, 「천대받지 않으며 살고 싶다」, 이상옥, 「고향에 돌아왔으나 가족은 간 곳 없고」(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 한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