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일본 덕분에 조선이 풍요로워졌다?

들어가며

“일본은 조선의 철도와 항구를 만들고 농지를 조성했고 오쿠라성(大蔵省, 현 재무성, 한국의 기획재정부에 해당-역자주)은 당시 많을 때에는 2000만엔이나 내어 주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때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 당시 외무성 참여)의 발언입니다. 1951년 한일국교정상화교섭이 시작된 이후 구보타의 발언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조선(한국)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라는 식의 발언이 일본 측으로부터 잇달아 나왔습니다. 1965년 한일 간의 국교는 정상화되었지만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관민을 불문하고 일본인들의 이러한 발언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의 실태를 보여줌으로써 위와 같은 이른바 “식민지지배=은혜”론에 반론을 해 보고자 합니다.

식민지 조선으로의 자금 유입

식민지 조선의 통기기구였던 조선총독부의 재정에는 일본정부의 재정으로부터 “보충금”이라는 명목의 보조금이 지출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구보타 발언에 등장하는 “2000만엔이나 내어 주었다”라는 말은 이 보조금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水田直昌監修『総督府時代の財政』友邦시리즈 제19호, 友邦協会, 1974년, 160쪽). 그러나 이 돈의 대부분은 조선총독부 및 그 부속기관에서 일하는 일본인 직원의 임금의 할증지급과 각종 수당의 재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보타 발언은 이 “내어 준” 돈이 철도 등 인프라 정비에 쓰였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이 “보충금” 외에도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재정자금 및 민간자금은 있었고 인프라 정비나 농업, 공업 등 산업개발에 투자된 돈도 있었습니다. 각 연도별 유입금은 산업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에 늘어났는데 특히 공업화, 군사화가 진전된 1930년대 이후에는 급증했습니다. 단 “내어 주었다”라는 논리로는 예금부 자금저금(우편저금)이나 유가증권매입 등의 형태로 조선에서 일본 국내로 이동된 자금의 존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각 연도별 유출액 또한 시간이 지난수록 늘어났습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시체제 하에서는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저축을 강요함과 동시에 저축금으로 일본국내채권을 구입하도록 강요했는데, 그 저축금(=조선인의 일본국내채권 구입금)이 급증하면서 유출액이 유입액을 웃도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 일본 국내로는 배당금, 보험지불 등의 형태의 자금유출액도 크게 증가했습니다(金洛年『日本帝国主義下の朝鮮経済』東京大学出版会, 2002년, 제5장 참조).

1910년 “한국병합조약”은 “완전 그리고 영구” 병합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정부에게도 민간투자가에게도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영구”적으로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일단 “내어 줌”으로써 조선에 투자된 자금은 조선의 산업개발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이윤과 지대, 혹은 이자와 배당이라는 형태로 소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득의 일부는 제국 본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더우기 전시체제에 들어서면 강제저축정책이 진전됨에 따라 연차 단위로 보면 이른바 일본이 조선에게 “내어 주”는 상황조차 사라졌습니다.

인프라 정비와 산업개발의 특질

앞서 말한 구보타 발언과 같이 조선총독부는 철도, 항만 및 농지조성 등 인프라 정비를 실시했습니다. 이 자체는 사실입니다만 목적과 수법에 있어 식민지라는 고유한 특징에 주목해야 합니다.

철도산업의 경우 “병합”에 앞서 러일전쟁 때 일본군부는 군사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해 철도를 급히 정비했습니다. 부산항의 항만정비도 바로 이러한 병참선 확보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입니다. 러일전쟁 때 철도산업을 위해 일본군부는 조선인의 토지 및 가옥을 강제수용했고 노동력도 강제로 징용했습니다. 일본은 조선민중들에게 “근대”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철도와의 “불행한 만남”을 강요했습니다(高成鳳『植民地鉄道と民衆生活』法政大学出版局, 1999년, 12쪽). 그 후에도 조선철도에는 중국대륙침략을 위한 병참선으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간선철도체계가 강화되었던 반면 조선 내의 로컬한 수송능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조선민중에게 조선철도란 일상적 교통수단으로서의 유용한 장치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농지조성(토지개량)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1920년에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이 계획은 1918년 쌀소동으로 드러난 일본 국내의 쌀 공급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서는 농업불황으로 인해 농산물 과잉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조선에서 일본 국내로 이입되는 쌀 이출량을 막기 위해 이 계획은 중지되었습니다. 농지조성사업의 목적은 조선 내의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보다 일본 국내의 쌀 수급 균형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에서는 대규모 수리사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저수지 등이 조성되면서 지역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수리를 이용하던 관행을 바꿀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지역농민들은 종종 수리사업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사업은 강력히 추진되었습니다(松本武祝『植民地期朝鮮の水利組合事業』未来社, 1991년』.

1920년대 후반 이후 조선 북부의 국경지대에서는 거대 댐 조성을 통한 전원(電源)개발사업이 착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지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화학비료(황산암모늄)는 조선뿐 아니라 제국 내의 농촌지역에 널리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산물이 화약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공업개발은 일본에게는 군사전략상으로도 중요했습니다. 거대 댐 건설로 인해 많은 지역 주민들이 사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반발을 사전에 단속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경찰력을 동원해서 토지와 가옥을 매수했습니다(広瀬貞三「水豊発電所建設による水没地問題-朝鮮側を中心に-」『朝鮮学報』제139호, 1991년』.

이상과 같이 식민지 하의 인프라 정비와 산업개발은 일본이 조선에게 강요한 군사적, 경제적 역할에 부응하는 형태로 추진된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강력한 권력을 동원해 대규모 각종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식민지 하의 조선에서는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강권적 사업시행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프라정비와 산업개발이 언뜻 보기에 “순조”롭게 실시되었던 이면에는 본인의 뜻에 반해 노동력을 징용당하고 생산과 생활의 기반을 물리적으로 빼앗긴 수많은 조선인들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많은 조선민중들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강권적 개발에 대해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저항활동을 억압했습니다.

산업개발의 결말

“병합” 시 조선은 농업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그 후 공업생산액이 급증하여 1940년에는 농업생산액과 같은 수준이 되었습니다. 재정, 민간부문의 투자로 농업생산은 늘어난 한편 농업생산을 훨씬 웃도는 속도로 공업생산이 늘어갔습니다.

단 이러한 생산력의 상승과 산업구조의 “고도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취업구조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유직자수의 농업종사자 비율은 1930년 81%에서 1940년 74%로 줄었습니다. 조선에 있었던 중화학공업 등 대공장의 경우 대부분은 당시의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계나 장치 등 설비투자에 거액이 투입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노동력은 그만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공업부문이 급속도로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노동력의 수요는 한정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기술관리, 생산관리는 조선에 살던 일본인의 화이트컬러나 기술자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취업기회는 더욱 더 제한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농업부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미증식계획” 과정에서 쌀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이출되게 되자 쌀 가격은 제국 내의 수급상황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쌀에 이어 중요한 상품작물이었던 면화와 누에도 방적자본, 제사자본(일본에서 조선으로 진출한 자본 및 일부 조선인 민족자본)이 지역마다 독점적으로 원료(면화, 누에)를 매입하는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 상품작물의 가격은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정해졌습니다. 한편 화학비료 등 농업생산에 필요한 재료구입이나 수리사업비(사업차입금 상환) 등 농민들의 현금지출부담은 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조선의 농촌은 면직물 등 재래산업부문이 발달했었는데 일본 국내로부터의 공업제품 유입, 조선에서의 기계제 섬유공업의 입지 등으로 인해 농민들의 자급적 생산영역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재래산업은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교통망의 정비가 이러한 경향을 촉진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인프라 정비와 산업개발은 조선농민들의  농업소득수준의 정체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겸업, 부업의 수입원까지 빼앗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 1은 조선의 농가호수의 추이를 보여줍니다. 자작농의 경우 1920년대 초까지는 조금 증가, 그 이후는 조금 감소하는 경향으로 바뀝니다. 자소작농은 일관되게 감소, 소작농은 오히려 일관되게 증가하는 추이를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농가소득(농업소득+농외소득)의 변화에 따라 부채가 누적되는 농가가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농촌에는 근대적 금융기관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들 부채의 대부분이 고리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 농가는 소유농지를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수의 자작농, 자소작농가(특히 후자)가 토지를 잃었습니다. 반면 일본인, 조선인 지주가 농지를 대량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비농업부문에서 노동력을 흡수하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궁핍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나서도 소작농으로 농촌에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작지를 빌리려는 농가가 늘면서 지주에게 지불해야 하는 소작료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채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고율 소작료도 마찬가지로 농민의 궁핍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주注1) 1920~32년의 자작농에는 경작지주(지주 을)를 포함
주注2)1919년 이전의 수치는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했다.

궁핍해진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고가인 쌀의 상품화량을 늘리면서 대신 “만주”에서 이입되는 조 등 싼 잡곡류를 구입해서 소비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도 1930년대 농업불황기 때에는 농촌에 머물 수가 없어 많은 수의 영세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건너가 도시부의 최하층 노동력시장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일부 농민들은 삼림지대에 들어가 화전농업을 했습니다(화전민). 혹은 경성(현 서울)시내에 들어가 도시의 잡역부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경성시가의 주변부에는 초라한 주거지를 만들어 살면서 일용직 노동 등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도시빈민(토막민) 부락이 형성되었습니다(사진-1을 참조. 이 토막집에 4인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진写真-1 토막민의 가옥(1940년경, 경성부)
출전出所: 京城帝国大学衛生調査部編『土幕民の生活・衛生』岩波書店, 1942년

맺음말

식민지 조선에서는 철도망 등의 교통기관이 정비되었고 대규모 수리사업과 수력전원개발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화학비료공업 등의 중화학공업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군사적 요청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조선의 천연자원을 개발해서 일본에 싼 값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인프라 정비와 산업개발 때에는 강권적 수법이 동원되었고 조선인 이해관계자들의 의사는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사업의 과정에서는 생산과 생활의 기반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나가야 하는 조선인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인프라 정비와 산업개발은 조선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농촌에서는 농업소득수준이 정체되었고 겸업, 부업의 기회가 감소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농민들의 소득수준은 정체되었고 농지소유권을 잃은 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반면 농지소유는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식민지 하의 조선은 공업화의 급속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비농업부문의 노동력시장은 한정적이었습니다.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농촌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농지의 소작료를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켰고 농민들의 소득수준을 정체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농촌에 남기조차 힘들어진 조선농민들은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토목작업 등 도시의 최하층 노동력시장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성과 같은 도시의 잡역부가 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렇듯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유입과 이를 원자로 삼은 인프라 정비, 산업개발은 조선민중의 생활수준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선민중들의 낮은 생활수준=노동력재생산비용은 반대로 조선에 투자한 자본가, 지주들에게 거액의 지대와 이윤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이들 지대와 이윤의 일부는 조선 내에서 재투자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식민지지배=은혜”론 및 그 전제가 되는 자금을 “내어 주었다”라는 논리는 이상의 논점을 무시한 폭론(暴論)에 불과합니다.


<참고문헌>

許粋烈(保坂祐二訳)『植民地朝鮮の開発と民衆 : 植民地近代化論、収奪論の超克』明石書店、2008年
金洛年『日本帝国主義下の朝鮮経済』東京大学出版会、2002年
高成鳳『植民地鉄道と民衆生活』法政大学出版局、1999年
松本武祝『植民地期朝鮮の水利組合事業』未来社、1991年
姜在彦『朝鮮における日窒コンツェルン』不二出版、1985年
林炳潤『植民地における商業的農業の展開』東京大学出版会、197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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