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을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로 삼았던 업자들을 경찰이 단속했다고 보도한 신문기사나 여성들이 자유의사로 응모했음을 보여 주는 신문광고가 있다고요?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씨 등이 참여한 역사사실위원회는 『동아일보』1939년 8월 31일자의 기사(자료참조)를 들어 여성들의 뜻에 반해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한 업자를 경찰이 단속했다고 발표했습니다(『워싱턴포스트』2007년 6월 14일자 광고). 이 신문기사는 한글원문에 영어 번역을 붙여 소개되었습니다. 부산의 경찰이 여성을 국외로 유괴하는 업자를 체포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정말 여성들을 그들의 뜻에 반해 위안부로 삼은 업자를 경찰이 체포했다는 내용일까요?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이 외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유괴와 인신매매에 의한 여성의 국외 이송은 형법 제226조에 위반되는 범죄이므로 경찰의 단속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내용이 “위안부”에 관한 것인지 아닌지입니다.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跋扈/農村婦女子를 誘拐/被害女性이 百名을 突破한다/釜山刑事 奉天에 急行
【釜山】만주 여랑자군대거 진출하야 그시세가 무척 높아진다고 조선내지 농촌에서 살길이 어려운 부여자를 도회지에서 잠동하는 소위 소개업자가 한없이 발호하야 최근부산부내에서도 악덕 소개업자 四五명이 결탁하야 순진한 부여자를 감언리설로 유혹하야 만주방면에 매■한수가 百명을 초과한다고 부산서 사범계에서 엄중취조를 하던중 동사건에 관계자인 봉천모소개업자를 체포하고저 지난廿八일밤에 유(유)경부보이하 형사六명이 봉천으로 급행하엿다고 하는데 동범인을 체포하고나면 악마같은 그들의 활동 경위가 완전하게 폭로 될것이라고 한다.
한번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여랑자군”이라 썼을 뿐 글 어디에도 “위안부”라는 단어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여랑자군”은 군의 “위안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군과는 관계없는 민간 “매춘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사의 “여랑자군”을 “위안부”로 단정짓기는 힘듭니다. 이 기사는 내용은 형법의 국외이송목적유괴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경찰이 단속하고 있다고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이러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조선인 여성들이 약취, 유괴 및 인신매매로 인해 “위안부”로 조선에서 국외로 이송되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군 혹은 경찰이 선정하고 신분증명서를 소지하고 있는 업자가 모으는 경우에는 묵인하고, 소지하지 않은 업자가 모으는 경우에는 적발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군과의 결탁관계가 없는 업자가 여성들을 국외로 이송하는 경우도 적발되는 사례는 일부였지 않았을까요.
다음으로 “위안부” 모집광고가 당시 조선의 신문에 실렸으니 여성들이 자유의지로 응모했음은 명백하며 수입도 좋았다 라는 일부에 퍼져 있는 의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제대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慰安婦募集広告と強制連行命令書の有無 現代史家秦郁彦氏に聞く」2007년3월2일). 신문광고란 『京城日報』(1944년7월27일자)와 『毎日新報』(1944년10월27일자)에 실린 광고를 뜻합니다.
『京城日報』에는 연령 17세 이상 23세까지, 일하는 곳은 “후방〇〇대 위안부(部)”, 월수 300엔 이상이라고 실려 있습니다. 모집하는 곳은 이마이(今井) 소개소라는 곳인데 소개업자(인신거래업자)입니다. 『毎日新報』에는 연령 18세 이상 30세까지, 월수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모집하는 사람은 허 씨라고 적혀 있으니 조선인 소개업자겠죠.
우선 월수300엔이란 상당한 고수입이라고 합니다만 이는 인신거래업자가 자주 쓰는 지저분한 감언이설의 상투적 수단입니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1937년 3월 대심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업자의 경우입니다만 1932년에 이미 월수 200엔에서 300엔 정도를 받고 있던 나가사키(長崎)의 여성들을 유괴했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과연 당시의 조선 여성들이 이 신문광고를 보고 응모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입니다. “위안부”를 강요당한 소녀들은 1920년대에 태어나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학령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과는 달리 식민지 조선에서는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지 않았으므로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다니려면 비싼 수업료가 필요했고 학교 자체도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도 조선사회에도 여자에게 교육은 필요없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존재했습니다. 여자의 취학률이 10%를 넘은 것은 1933년 경이었습니다. “위안부”를 강요당한 소녀들의 대부분은 글자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소녀를 인신매매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신문을 구독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업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와 같은 광고를 실었을까요? 그 대상은 다른 인신거래업자(하청업자)였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京城日報』도 『毎日新報』도 사실상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고는 국외이송을 목적으로 하는 “위안부”를 공공연하게 모집함으로써 “위안부” 모집에 한해서는 총독부가 인정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광고주는 군이 선정한 모집업자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집업자의 광고에 응한 하청업자가 여성들을 모을 경우 대부분 인신매매와 유괴 등의 수단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이 광고는 이러한 상황을 총독부가 묵인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京城日報』에는 “月収三〇〇円以上(前借三〇〇〇円迄可)”라고 일본어로 쓰여 있습니다(기사의 뜻은 월수 300엔 이상(선급금 3000엔까지 가능)-역자주).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사입니다. 같은 광고가 23일, 24일, 26일 계속 게재되었는데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점을 아울러 생각해보면 이 시기에 군이 “위안부”를 필요로 하여 급히 모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24일부터 “前借三〇〇〇円迄可”라는 문구가 추가된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하청업자에게 인신매매 자금을 제공한다는 문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광고는 조선총독부가 국외이송을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와 유괴를 “위안부” 이송에 한해서는 묵인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신문광고는 조선에서 부인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 금지하고 있는 21세 미만 여성의 국외이송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고 조선총독부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