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3월 4일 육군성부관통첩 「군위안소종업부등 모집에 관한 건」은 중국에 있는 파견군(북지나방면군, 중지나파견군)이 선정한 업자가 일본 내지에서 유괴와 유사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으로 파견군은 업자를 엄밀히 선정하고 모집 시에는 헌병, 경찰과 긴밀히 연계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통첩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이 통첩에 따라 파견군 지시에 의해 일본, 타이완, 조선에서는 헌병, 경찰과 긴밀히 연계하고 군이 선정한 업자가 “위안부”를 징모(徴募)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과 타이완에서는 업자의 인신매매 및 유괴 등으로 인한 여성들의 국외이송과 만 21세 미만 여성의 이송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범죄 혹은 위법행위입니다. 그렇다면 헌병과 경찰은 공범자가 됩니다. 파견군 또는 조선, 타이완의 헌병과 경찰은 업자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모으게 했기 때문에 주범이 되겠지요.
또 하나의 경우로는 일본 내지에서는 엄밀히 연계하여 위법행위를 단속했지만 조선과 타이완에서는 묵인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통첩에서 일본 내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일본군의 위신을 떨어뜨리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으니 이 두번째 경우가 실태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라 하더라도 책임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통첩이 나온 후에 벌어진 일도 함께 생각한다면 이 통첩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내용은 틀림없이 위의 두 가지일 것입니다.
이 통첩은 그 후의 “위안부” 징모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고 특히 군이 “위안부” 징모를 통제했다는 증거(징모에 군이 깊이 관여했음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군이 업자의 난폭한 모집을 중지시킨 증거다”라고 하는 일부의 해석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안소는 군을 위해 군의 시설로서 군이 만든 것입니다. 업자에게 위안소의 경영을 맡기는 경우에도 군은 위안소의 운영을 감독, 통제하였습니다. 위안소는 거주의 자유, 외출의 자유, 폐업의 자유(자유폐업), 거부할 자유가 없는 성노예제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시설을 만들고 그곳에 여성들을 가두고 군인들의 성 상대를 강요했으니 군에는 중대한 책임이 발생합니다.
군이 이러한 시설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여성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도 없었을테니 “좋은 관여”란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