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배전후의 처우는 여성들의 민족이나 끌려간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국인이나 필리린사람 등 점령지의 여성은 주로 현지에서 ‘위안부’ 등의 성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일본인이나 조선・대만의 식민지 출신 여성들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점령지나 전쟁터에 이송되어 ‘위안부’가 되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일본군에 의해 침략・점령당한 중국이나 아시아・태평양 제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나 위험한 전선에까지 끌려갔었습니다. 더욱이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 여성들 중에는 해외에 이송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지에서 패전을 맞이한 일본인 ‘위안부’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나서 귀국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일본인 거류자들과 함께 귀국선 등으로 귀국하였습니다(나가사와 켄이치, “한구 위안소” 등). 그러나 그녀들에게 전후는 고난에 찬 시기였습니다(→증언편:일본인 위안부로)
버려진 조선인 ‘위안부’들
식민지출신 여성은 어떠했을까요? 조선인여성은 일본군이 패전을 알리지 않아서 현지에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①전쟁터에 버려져 사망한 경우, ②자력으로 귀국한 경우, ③원하지 않았지만 현지에 잔류한 경우, 이렇게 세 종류입니다.
먼저, ①전쟁터에 버려져 사망한 경우입니다. 어느날 일본군이 사라져버려 적진에 남겨져(방치), 지리나 언어도 모른 채, 통용되는 돈도 없고, 위험한 상태에서 귀국할 방편도 없이 사망한 여성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진은 조선인’위안부’의 사체입니다만 ‘참호는 여성의 사체로 꽉 차있었다.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194년 중국의 ㅇㅇ=버마 국경지대). 또한 1944년 말부터 1945년 봄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전선에서는 전황이 악화되어 각 부대가 그때까지 데리고 다닌 조선인’위안부’를 ‘쓸모없는 누더기를 버리는 것처럼’ 버렸다고 합니다(센다 가코, “종군위안부 <정편>”). 이러한 일이 패전 후 여기저기서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②자력으로 귀국한 경우는, 황금주 씨는 중국에서, 강덕경 씨(일본군인의 아이를 임신중)는 일본에서 자력으로 귀국했습니다. 박두리 씨는 대만의 위안소에서 심부름을 하던 조선인 남성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박영심 씨는 곤명昆明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중경重慶에서 광복군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습니다(→증언편). 중국에 끌려간 최갑순 씨는 두부장수를 하면서 걸어서 한국에 귀국했습니다만, 4년 걸렸습니다. 귀국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던가,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고국에서의 남은 반평생도 쉽지 않은 인생이었습니다(→입문편7)
③현지에 남겨진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들어 중국의 내륙부에 있는 무한武漢을 예로 들어보지요. 무한武漢에는 1938년 11월에 개설한 중국 최대의 일본군위안시설이 적경리積慶里에 있어서 약 20개 위안소에 일본인여성 130명, 조선인 150명이 ‘위안부’로 있었다고 합니다(야마다 세이키치山田清吉, “무한병첨武漢兵站”). 나가사와 겐이치 군의관 대위에 의하면, 일본인’위안부’들은 패전 다음해 봄에 부현 단위로 조직되어 귀국선에 귀국하였습니다(나가사와長沢, “한구위안소漢口慰安所”). 나가사와는 조선인’위안부’는 광복군과 함께 고국에 귀국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한武漢에서 ‘위안부’가 된 송신도 씨는 군조였던 일본인 남성에게 유혹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만, 그는 일본에 와서는 그녀를 버렸습니다. 하상숙 씨와 같이 ‘수치심’ 때문에 고민하던 중에 귀국할 기회를 잃고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무한武漢주변에 거주하게 된 여성들이 다수 있었습니다(그 숫자는 하상숙 씨에 의하면 1950년대 후반에 32명, 1990년대에는 9명이었습니다{“중국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들”}).
또한 중국동북지방(이른바 만주)에 연행된 박옥선 씨, 이옥선 씨, 김순옥 씨, 싱가폴에 연행되어 태국에 잔류한 노수복 씨, 오키나와 도카시키섬에 연행되었던 배봉기 씨 등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숫자의 조선여성이 현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버려진 조선인’위안부’”). 그녀들이 한국정부나 지원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귀국을 하게된 것은 반세가 넘은 1990년대, 또는 2000년대 들어서입니다. 대만인 여성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이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운 좋게 귀국을 할 수 있었거나, 현지에 잔류해서 살아 남았거나 말 그대로 ‘서바이버(생환자)’라고 부르기에 딱 맞는 피해여성들이 있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본군은 일본인’위안부’는 귀국시켰습니다만, 스스로 입안・실행한 ‘위안부’제도에 의해 식민지에서 전지・점령지에 끌려온 조선인이나 대만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귀국시킬 방도는 세우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일본정부가 전후책임・식민지책임을 방기한 것은 그들을 전쟁 직후에 버려두고 간 때부터 시작합니다.
전후보상 받지 못한 채 버려짐
1990년대 들어서 한국 등 아시아 피해자가 잇달아 증언을 할 때까지 일본정부는 반세기 이상이나 방치・묵살해왔습니다. 일본정부가 군 관여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은 1991년 8월14일 김학순 씨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명으로 얼굴을 밝히고 증언을 시작하고, 1992년 1월에 군이 깊은 관여를 증명하는 자료가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것이 보도되고나서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본정부는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 피해 생환자에 대해 귀국 조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전후보상에 관해서는 어떠한가요? 일본정부의 전후보상정책에서는 일본인 남성 군인・군속에 대해서 ‘국가보상의 정신에 기초한’ 개인보상(군인은급)이 1952년부터 실행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위안부’에게는 일본정부가 개인보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1995년에 일본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국민기금 혹은 아시아여성기금)을 창설하였습니다만, 이것은 민간으로부터 모금을 한 ‘쓰구나이금(原文:償い金)’이지 국가보상은 아닙니다(역주:보상금이 아니라 위로금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에도 일본인 군인・군속과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후보상에서도 ‘남겨져 버려진’ 것입니다.
<인용・참고문헌/영상>
・센다 가코(千田夏光)『종군위안부〈정편編〉』산이치서방(三一書房), 1978년
・양현아「식민지 후에 계속된 한국인 일본군’위안부’피해」액티브・뮤지엄「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편,『증언 미래로 향하는 기억 아시아’위안부’증언집Ⅱ』 아카시서점(明石書店), 2010년
・야마다 세이치(山田清吉),『무한병첨』도서출판사(図書出版社), 1978년
・나가사와 겐이치(長沢健一), 『한구위안소』도서출판사(図書出版社), 198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 편、야마구치 아키코(山口明子) 역, 『중국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위안부’들』아카시쇼텐(明石書店), 1996년
액티브・뮤지엄「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카탈로그『남겨져 내버려진 조선인’위안부’』2006년
・안세홍(저・사진)『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이야기』오츠키서점(大月書店),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