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양징자
박유하의『 帝国の慰安婦』(朝日出版社)는 다각적, 종합적으로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피해자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의 이른바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 책을 칭찬하고 있는데 저는 이러한일본에서의 반응이 염려스럽습니다. 그들은 ① ‘위안부’가 된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하고 각자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② 자국(한국)의 내셔널리즘을 “공평하게” 바라본 “고독한” 작업이라는 이유로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책에서 ①에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나는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 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저는 이러한 인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사람들은 모두들 같은 마음가짐으로 피해자들을 만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유하가 “그런 목소리는 지원자들에게 무시당했다”, “위안부들의 ‘기억’을 취사선택해왔다”라고 기술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와의 관계가 구조적으로는 ‘같은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다”라고 하는, “그녀들에게는 분명 소중했을 그 기억을 그녀들 스스로가 ‘모두 버리’게 된다. 그 이유는 (그기억을)‘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이라고 박유하는 말합니다. “그 기억을 은폐하려 한 것은 우선 당사자들-그녀들 자신이 었다”라고 하며, “그러한 기억을 없애고 망각시키는 것은 (…) 폭력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위안부’에 대한 집단기억을 만들고
또 굳혀온 것은 한국의 지원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와의 관계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하는, 그녀들에게는 분명 소중했을 그 기억”이라는 박유하의 해석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스스로가 말하지 않게 된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지 않게 된 원인은 사회의 몰이해와 억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가까이 다가가, 당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된다고 계속 이야기해 온 사람
은 지원 단체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해 증언의 폭력적인 취사선택과 해석 방식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들은 다른 점령지의 피해자들과 달리 “제국의 위안부”로서 일본군 병사와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소설뿐 아니라 자신이 비판하는 정대협과 정신대연구소가 편찬,출판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5권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정대협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진지하게 듣고 여섯 권의 증언집1으로 기록, 간행하여 있는 그대로를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박유하는 이 증언집에서 ‘위안부’ 중에는 일본군 병사에게 연애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든지, 군인과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 경우도있었다든지 하는 증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의 표지에는 “위안부들의 증언을 정성껏 취합해”라고 쓰여 있는데, 이 증 언집에서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에 맞는 부분만을 “정성껏 취합
한” 것이 바로『제국의 위안부』입니다. 박유하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제국의 위안부』야말로 피해자들의 증언을 “취사선택”했으며 “폭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증언의 취합 방식뿐 아니라 해석 방식도 폭력적입니다. 박유하는 문학작품을 읽고 평론하는 듯한 방식으로 이 증언집을 해석하려 했습니다만, 상상력의 결여와 독해력의 졸렬함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는 증언 중 “자발성” 부분을 삭제했다?
한 가지 예로, 일본에서도 출판된 피해자 정서운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3D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2를 들어보겠습니다. 박유하는 정서운 할머니가 “스스로” 갔다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부분의 음성이 고의로 삭제되었다고 지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작인 한국어판에는 “그래가지고 내가 자청을 해서 간 기라”라는 음성과 함께 한국어 자막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일본어판의 자막은“行くって言ってしまったんだよ(간다고 해버린 거라)”라고 짧막하게 붙어있지만 음성은 삭제되지 않고 한국어판과 똑같이 나옵니다.
게다가 이 증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놋그릇 공출에 저항하던 아버지가 체포되자 딸 정서운은 공장으로 일하러 가면 아버지를 석방시켜주겠다는 말을 믿고 스스로 가겠다고 했다,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를“자발적으로 갔다”라고 해석하는 박유하의 감각을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실제로는 지우지도 않은 음성을 작가 또는 운동단체가 지웠다는 말까지 지어내며 운동단체를 “위안부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로 묘사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본인의 자발성 유무에 따라 피해에도 차이가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피해자들로 하여금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 못하도록 만든 무언의 압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여성의 성을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중대한 인권침해였다는 것이 ‘위안부’ 문제의 본질입니다. 만일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해서 갔다고 하더라도, 혹은 ‘위안부’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갔다고 하더라도, 그 여성들에 대한 국가의 죄가 면죄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사반세기에 걸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이 알아낸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군인에 의한 폭력적인 연행만을 ‘강제연행’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강제연행’이 아닌 경우를 ‘자발적’인 것처럼 말하는, 그런 시각 때문에 피해 당사자들 중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게 된 분들이있다는 사실을 박유하야말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편에 대한 증언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다.
<소녀 이야기>와 관련된 기술 중 재판3에서 삭제 결정이 내려진 부분은 아래 문장입니다.
아편은 하루하루의 아픔을 잊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대부분은 ‘주인’이나 상인을 통한 직접 사용이었다. 군인과 함께 사용한 경우는 오히려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는 한국어판을 처음 읽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렇게 표현되었음을 알고 나눔의 집(Q19 주1) 할머니들이 소송이라는 수단을 택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어판에도 “아편은 신체의 아픔을 완화하는 한편 때로는 성적 쾌락을 배가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박유하는 위 증언집을 근거로, “아편은 군인과 함께 사용한 경우에는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성적 쾌락을 배가시키기 위해 쓰였다”라고 기술했습니다. 증언집의 수록 내용 중 그 근거가 되었다고 추정 가능한 부분은 아래 인용문, 딱 한 군데였습니다.
군인들이 몰래 찔러줬는데. 같이 아편을 찌르고 그걸 하면 그렇게 좋다고 하면서 여자도 찔러주고 자기들도 찌르고, 그렇게 했어요.
보시다시피 이 문장의 주어는 군인입니다. 군인이 무슨 말을 하면서‘위안부’ 여성들에게 아편 주사를 놓았는지를 말하는 증언입니다. 위안소라는 곳을 너무나도 목가적으로 보는 환상이 없다면, 이 증언을 ‘위안부’ 피해 여성이 함께 즐기기 위해 아편을 사용했다고 해석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의 증언을, 그 증언을 할 때의 고통스러운 표정까지 포함해서 들어온 우리들 입장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해석입니다.
●송신도 할머니의 증언에서 알 수 있는 복잡성 PTSD
제가 지원해온 송신도 할머니의 예를 들겠습니다.4 송신도 할머니는 처음으로 군인에게 당했을 때의 일을 물을 때마다 항상 말을 돌리며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위안부’를 강요받은 7년 중 초반 3년에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후반 4년에 대해서는 본인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지켜냈는지를 자랑스럽게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송신도 재판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언행이 지니는 의미를 계속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하고 분석해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주디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의『心的外傷と回復』5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허먼은 가해자에게 장기간 감금된 피해자가 보이는 장기반복성 외상에 대해서는 현행 진단기준으로는 대응할 수 없고 ‘복잡성 PTSD’라는 새로운 진단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송신도 할머니가 보여준 다양한 시그널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거나 군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죽는 것만큼은 싫었다”라고 하는 송신도 할머니는 전장의 위안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싫다고 하는 마음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반 3년간, 특히 첫 강간에 대해서는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고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속아서 끌려간 당시, 송신도 할머니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위안부’를 강요당하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송신도 할머니는 신체의 목숨을 선택했습니다. 목숨을 선택하기 위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마음과 기억이 그 후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끼 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허먼에 따르면, 장기간 감금된 피해자는 가해자를 통해서만 바깥세상을 알 수 있으며 가해자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본 군인의 꼬임으로 일본으로 건너오지만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버림당한 송신도 할머니가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져, 전장에서 자신의 마음까지 죽여가면서 지켜온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는 이야기도,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해 불가능함을 자각하기
아주 오랫동안 본인의 경험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한 피해자의 증언을 최근에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피해자가 있었던 위안소에는 방 세 개에 ‘위안부’ 네 명, 평일에는 세 명이지만 주말에는 네 명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방은 세 개밖에 없다면서요?”라고 묻자 “그러니까 다 보여! 짐승의 생활이라고 했잖아!”라며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제가 만난 그 분이 가장 어렸기 때문에 2인 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공간을 나누는 그 무엇도 없이 바로 옆에서 또한 명의 ‘위안부’가 군인을 상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광경이 떠올라 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피해자는 설날에 부대에서 떡메 치기를 했다고 말하면서 딱 한 번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때의 그 떡이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맛있었다고 하면서. 수년간의‘위안부’ 생활 중 단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말할 때 띠는 그 미소 뒤에 지옥 같았을 매일매일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 ‘위안부’는 송신도 할머니처럼 오랜 기간 ‘위안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피해는 지극히 복잡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무리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하더라도 평범한 경험만을 가진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박유하에게는 이 겸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10여 년 전『オレの心は負けてない』6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는데,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국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안고 있는 어둠은, 평범한 체험밖에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들의 운동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어둠의 깊이를 인식하면서 알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송신도 할머니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녀를 운동에 이용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절대 용납지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기며 임해 왔다.
피해자도 타협하고 다가가야만 ‘화해’다?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단체가 피해자들의 “기억을 억압”하고 피해자들을 운동에 이용하여 ‘위안부’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인식이,현재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특히 이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리버럴한 지식인들 가운데 이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권을 존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 문에 자신들이야말로 ‘지원단체에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의 인권을 지켜주려 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스스로의 의사도 없는, 지원단체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나약한 존재인 것처럼 보는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반인권적인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해온 생존자들은 지원자들이 ‘조종’할 수 있는 나약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들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한국 측에서도 양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정치 · 외교 문제로 보고 외교적 관계에서 어느 한쪽만이 이길 수는 없으니 한국과 일본이 서로 양보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피해자들도 타협하고 다가가야만 화해가 가능하다는 이러한 논조에 박유하의 책은 힘과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본어판에서는 본인이 ‘국회 결의’를 통한 해결을 새로이 제시했다고 박유하는 강조하는데, 이는 이미 정대협의 7대 요구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국회 결의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으로 8개국의 생존자와 지원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작성한 「제언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에는 ‘국회 결의’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정치구조상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를 넣기보다 피해자들의 원칙적인 요구를 반영하면서 일본 정부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안을 강구해낸 것입니다.진정한 해결을 바란다면 일본 정부가, 우리가 제시한 ‘제언’에 따르도록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1 위에서 말한 증언집 1~5권과 여섯 번째 증언집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2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정서운 할머니의 인터뷰 육성을 담은 김준기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 일본에서도 김준기 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역,『 日本軍「慰安婦」被害者 少女の物語-DVD付き絵本』(日本機関紙出版センター, 2014)으로 출판되었다.
3 2014년 6월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유하의 한국어판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명예훼손과 출판금지가처분을 요구하며 제소한 재판. 이듬해 2015년 2월 서울지방법원은 명예훼손을 인정해 34군데의 표현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 등을 금지하겠다는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Q19의 주2를 참조하기 바란다.
4 16세 때(1938년) 속아서 중국 무한으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 패전 후 일본의 군인에게 끌려 일본으로 갔다. 1993년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제소했다.
5 ジュディス・L・ハーマン 著, 中井久夫訳, みすず書房, 1996. 증보판은 1997.
6 在日の慰安婦裁判を支える会 編,『 オレの心は負けてない―在日朝鮮人「慰安婦」宋神道のたたかい』, 樹花舎, 2007.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안해룡 감독,2009.)도 있다.
■ 양징자(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공동대표)
(이 글은 2015년 8월 14일에 개최된 <전후 70년, 동아시아 포럼>의 분과 ‘가해자가 ‘화해’를 말할 수 있는가’에서 발언한 내용을 가필 수정한 것입니다.)
【2016.6.7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