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鄭栄桓)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특징은, 일본군에는 ‘위안부’ 제도를 ‘발상’하고 업자의 인신매매를 ‘묵인’한 책임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후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해 왔음을 강조하는 점에 있습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전후사戰後史’를 긍정하고픈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있으니, 일본의 우파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까지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어판에서 보다 잘 드러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에 대해, 한국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지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식민지화 과정에서의 동학군의 진압에 대해서도,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수감/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関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민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262쪽)
동학군의 진압과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살해를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로 규정한다면 이 규정은 명백히 역사적 사실에 위배됩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저자가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지는 알겠습니다. 일본은 조선인 ‘위안부’를 포함한 식민지 지배에 관련된 가해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이 없다, 바로 이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윗 단락 바로 다음에는, 그렇다고 해서 “한일조약 자체를 깨고 재협상하는 것이 꼭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일본어판에서는 윗 부분이 다음과 같이 고쳐쓰여 있습니다(밑줄 부분이 추가된 문장입니다).
그러한 의미로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이 없다.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 왔고 이 사실은 한국에 보다 더 알려야 하겠지만, 그것(지금까지의 사죄-번역자주)은 실로 애매한 표현에 불과했다. 1919년의 독립운동 때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대진재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제국 일본’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없는 채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단, 위와 같은 경우에 처한 일본인 또한 그러한 사죄나 보상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이것은 치안유지법 등 당시의 체제비판을 단속하는 법률에 근거하여 행해졌기 때문에 적어도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는 일이 된다.(일본어판 251쪽)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 보면 일본어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강조점이 고쳐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치안유지법으로 탄압받은 일본인들도 조선인과 “같은 경우에 처”해 있었다는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3.1운동과 간토대진재 때의 조선인학살과 일본인에 대한 탄압이 똑같은 ‘제국 일본’에 의한 탄압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로 뭉뚱그려지면 식민지 지배 고유의 가해성이 희석화되어 버립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어판만 읽었을 때에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 가해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만, 일본어판에 추가된 문장을 보니 ‘제국 일본’ 하에서의 일본인의 피해와 같은 성격의 문제로 ‘위안부’ 문제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위안부’니까,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과의 관계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의 ‘적국’ 여성들과 일본군과의 관계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입장임을 생각하면, 3.1운동에 대한 탄압과 치안유지법에 근거한 일본인 탄압을 “같은 경우”로 다룬 일본어판의 내용이 저자의 ‘논지’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본어판의 독자를 위해 바꿔쓴 부분 중에 주목해야 할 포인트로서, 저자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일본정부는 식민지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라고만 쓰여 있는데, 일본어판에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 왔”다는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문장이 추가되면 “공식적으로”라는 의미가, 사죄를 한 사실은 있으나 “애매한 표현” 때문에 한국에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가 세계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후 처리’였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다른 전前 ‘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쟁뿐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타국의 지배는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앞장서서 표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표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한국어판 263쪽)
만약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한다면 다른 “전前 ‘제국’ 국가들보다” 앞서게 되니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문장만 보면 저자는 일본이 아직 이러한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표명을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한일협정에 근거한 ‘경제협력’이 ‘전후 보상’이었다는 저자의 주장도 사실오유로서 비판해야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Q18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본어판에서는 아래와 같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는 구 식민지 종주국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이었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일본도 애매하기는 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천황과 수상의 사죄는 있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한정되긴 했지만 보상도 했으니 일본의 <식민지지배 사죄>는 실은 구 제국 중 가장 구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네덜란드 등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끝난 전후 처리를 더욱 보완한 것이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지배후 처리>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본어판 253쪽)
한국어판에서는 “‘법적 책임’은 졌다”라고 하면서, 일본어판에서는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전후 처리’(심지어 법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라고 여겼으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식민지지배후 처리>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사죄가 한국인에게 기억될 기회도 그 시점에서는 잃었다”(253쪽)라고 썼습니다. 즉 원래 법적 책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게다가 사죄를 했냐 안 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 및 성격을 명확히 밝혔는지 여부가 문제라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표현방법의 차원으로 전도시켜 버렸습니다.
위와 같은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차이점을 보면 저자가 일본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둘 모두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는 있지만, 일본어판에서는 “만날 때마다 사죄”는 했으나 “애매”했다는 문장으로 바뀌면서, 전후 일본의 역사는 ‘사죄・보상’을 해 온 역사로 고쳐쓰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가장 구체적인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기억”하지 않은 한국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국의 위안부』의 수많은 사실인식의 오류와 모순, 논리적 비약에 대해서는 졸저 『忘却のための「和解」 『帝国の慰安婦』と日本の責任』(世織書房, 한국에서는 『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으로 푸른역사에서 출판 예정)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쓰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일본의 논단이 『제국의 위안부』를 예찬하는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지적 퇴락’의 종착점이라는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분석을 통해, 저자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조선인 위안부’로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오로지 귀를 기울이는 것”(일본어판 10쪽)이 아니라 일본 사회가 어떠한 셀프 이미지를 원하는지를 알아내고 그 이미지에 걸맞는 ‘위안부’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죄’에 관해 강조하는 포인트가 일본어판에서 바뀐 바로 그 부분이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이 책을 예찬해 마지않는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적 분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출처:『(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 』
(엮은이:이타가키 류타,김부자,기획:’일본군’위안부’문제 웹사이트제작위원회,펴낸곳:삶창,2016년발행)
※이 칼럼은 한국어판을 간행하면서 새로이 추가된 글입니다.